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아일보 May 31. 2017

조언에 사로잡힌 육아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 윤재와 아빠는 각각 한 손에 장난감 로봇을 들고 놀고 있다. 아빠의 로봇은 악당, 윤재의 로봇은 지구특공대. 윤재의 로봇이 아빠의 로봇을 공격하는 것 같더니, 아빠의 로봇 팔이 떨어져 나갔다. 아빠는 “각오해라”라며 윤재의 로봇을 온몸으로 부딪쳐 박살내버렸다. 화가 난 윤재는 아빠를 닥치는 대로 발로 찼다. 아빠는 잠시 생각했다. 


친구 같은 아빠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참아야 하는 거야?
같이 때려야 하는 거야?



영주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가계부를 쓰고 있다. 이번 달 교육비가 무려 3배나 초과했다. 전집을 안 샀으면…, 특별학습을 신청하지 않았으면…, 논술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잠시 후회가 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내가 이 돈 아까워하면 안 되지.
무릇 부모는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하는 거니까.



민철이가 동생을 때렸다. 엄마가 왜 때렸는지를 물었다. 아끼는 조립식 장난감을 동생이 망가뜨렸다고 한다. 엄마는 민철이가 그 장난감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기에, 동생을 때린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차마 민철이를 혼내지 못했다. “그래, 그랬구나. 민철이가 많이 속상했구나”만 되뇌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어제 TV에서 본 전문가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육아는 너무 많은 명제에 사로잡혀 있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혹은 아이를 잘 키워낸 유명인들이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키워라’라는 명제를 쏟아놓는다.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좋은 말들이 육아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육아 명제는 너무나 짧다. 중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 구절만 보아서는 아무리 좋은 명제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명제의 ‘단어’에만 집착하여 잘못된 방식으로 적용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친구 같은 아빠’는 아빠들이 워낙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친구처럼 친밀한 시간을 되도록 많이 보내라는 뜻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깊은 믿음과 단단한 신뢰를 갖게 하기 위해서다. 친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잘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도 무조건 빨리 많이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능력, 수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이나 인성과 관련이 깊다.


‘아이 마음 읽어주기’는 아이의 생각, 마음, 감정 등을 수긍해주고 존중해주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수긍은 하되, 잘못된 행동은 안 되는 거라고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 따라서 모든 상황에서 최우선은 아니다. 아이가 위험할 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줄 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할 때는 훈육이 먼저고, 마음 읽기가 나중이다. 마음 읽기는 아이의 역성을 들어주기가 아니다. 

‘좋은 부모’라는 말도 그렇다. 도대체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 너무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좋은’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육아의 모든 것에 ‘좋은’을 적용하려고 들면 과잉 육아를 하기 쉽다. 당연히 육아가 버겁고 힘들어진다. 쉽게 화나고 자주 불안해진다.


육아 명제를 따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명제로 인해 오히려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내 육아에 적용하기에 앞서 ‘내 육아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최소 20년이다. 그 긴 여정 동안 아이를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도와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 속에는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아이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가,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포함될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나의 육아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 기준, 개념들이 정리된다. 그것이 쌓이면 가치관이나 철학도 생길 것이다. 명제는 그 이후에 내 삶에 적용해야 한다.

앞으로도 육아 명제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광고 카피처럼 바로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자극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 육아의 철학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자. 없다면 그것부터 고민해야 한다. 육아 명제는 ‘어떻게’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육아에 또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런 명제가 왜 나왔을까. 나의 육아에 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뭘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하면, 명제의 좋은 점만 나의 가치관에 녹아들어 나의 가치관이 확장될 것이다. 더불어 어떤 육아 명제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매거진의 이전글 잘못된, 혹은 위험한 훈육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