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잘 안 맞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내 주변만 봐도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코드가 잘 맞는 친구들만 남아 있다. 애들 보느라 나갈 수 있는 시간도 줄고 사람들 만날 에너지 자체도 줄어들어 굳이 안 맞는 사람까지 만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정리가 된다.
하지만 코드가 맞지 않아도 영원히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늘 내 곁에 있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 아아 그 이름 가족, 그 이름도 정겨운 우리 엄마.
엄마는 나와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다. 엄마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 엄마는 짬뽕 나는 짜장. 사소한 기호도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다르다. 특히 엄마는 평범한 일상 대화로 시작해서 결국엔 내 기분을 망쳐놓는 능력에 있어 국내 최고 권위자다. 단언컨데 엄마와 20분 이상 대화 지속시 내가 평정심을 잃을 확률은 100%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엄마이지만 육아에 있어서 엄마는 철저한 갑 나는 을이다. 아내가 장기 출장이거나 야근 시즌이라 아이들을 혼자 봐야 할 때면 엄마한테 카톡을 정중하게 보내서 육아 도움을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 아이들이 계속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는데 퇴근하고 저희 집에 오실 수 있으세요?^^
와 주실거죠?
엄마는 은퇴 후 공인중개사 일로 늘 바쁘시지만 이렇게 헬프를 요청하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하고 와주셨다. 엄마는 나와 달리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편이라 우선 우리 집에 오면 아이들과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 몇 시간동안 핸드폰 한번 보지 않고 아이들과 그림도 그려주고, 선생님 학생 놀이도 하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참 잘 놀아준다.
아이들도 그런 할머니를 좋아하고 잘 따른다. 기특하게 아이들은 아빠 한번 찾지 않고 할머니 옆에 꼭 붙어서 논다.나 역시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엄마가 오는 날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요즘 오은영박사 프로에 심취한 엄마는 육아 긴급 상황이 생길 때마다 오은영 가라사대를 외치며 상황에 대한 솔루션을 나에게 제시하곤 했다. 그러니깐 엄마는 이미 남몰래 육아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 하느님 아버지. 오은영박사님 방송을 제발 금지시켜 주세요.)
-아들아 애들 영상 많이 보여주지 말아라.
-아들아 이럴 땐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이 놈아 애들은 그렇게 혼내지 말고 말로 타일러야 한다.
.......
훈수. 우리는 얼마나 훈수를 싫어하는가.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기를 두고 있으면 옆에서 훈수하는 친구의 말은 얼마나 얄미웠던가. 나는 몇 번을 그렇게 꾹 참고 참다 결국 폭발해 엄마한테 그만 좀 하라고 일갈하게 된다.
지난번엔 엄마와 아이들과 저녁을 같이 먹고 있었다. 첫째 둘째가 밥상머리에서 너무 장난치고 밥을 안 먹어서 혼을 냈더니
-아빠도 어렸을 때 할머니 말 안 들었잖아!!!
하고 첫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지고 들었다. 나는 그 명랑한 소리에 말문이 막혔고 같이 있던 엄마는 첫째의 이야기가 너무 우스운지 빵 터지고 말았다. 첫째는 자기가 뭐 엄청 대단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밥을 마저 먹고 자리를 떴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어렸을 땐 그랬다 쳐도 지금은 결혼하고 애도 기르고 있으니 뒤늦게 효자가 되어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실제로 엄마땐 나를 낳고 육아휴직을 석 달 정도 쓰고 회사에 복직해야 했고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친척들에게 나와 동생을 맡기고 회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거기에 어떻게 산후조리원도, 어린이집, 유튜브, 넷플릭스도 없이 애 둘을 키우셨는지.. 우리 어머니 세대는 라떼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그런 엄마 눈엔 육아휴직 써 놓고 애 둘 키우면서 힘들다고 헉헉대는 아들이 얼마나 이해가 안 될까.
이렇게 엄마가 기꺼이 와주신 것만으로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도 엄마의 훈수 몇 번에 아마추어처럼 흥분을 하다니.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 가도 나는 참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아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아들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좀 더 자주 우리집에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