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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이 Dec 29. 2022

인간의 운명과 삶에 대한 단상

연말연시에 느끼는 삶과 운명에 대하여

 어느덧 연말연시가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도 지났고, 이틀만 지나면 드디어 1년이 지나간다. 올해는 많은 도전을 이뤄냈다. 나름 이곳저곳에서 일도 열심히 해보고, 글도 써보고, 브런치 작가도 합격하며 작년보다 뜻 깊은 날들을 보냈다.     

 

 뉴스를 틀면 홀로 살아가시는 독거노인분들 또는 불우아웃 이동들이 영하의 추위에 옷을 꽁꽁 겹쳐 입은채로 한겨울을 보내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운명론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분명 자유의지가 있고, 열심히 노력한만큼 정당한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질병을 갖고 출생을 한 분들을 보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의의 사고로 치명상을 입은 분들을 보면 생각이 참으로 많아진다. 누군가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눈물을 흘려갈 때, 또 누군가는 명품옷을 두르고 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누군가는 사회의 높은 위치, 명예직에 올라 고소득을 올리며 살아가지만, 또 누군가는 하루하루 만원 남짓 되지도 않는 돈을 사력을 다해 벌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쪽방촌_뉴시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모두 다 태어날 때는 똑같이 축복받으며, 누군가의 뱃속에서 열달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며 이 세상에 나왔을텐데 왜 이리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인생에 큰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걸까? 부모를 잘 만나서 그런걸 수도 있겠다. 요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비단 그런 문제로 일반화 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는 가난한 형편에서도 불철주야 노력하여 꿈을 이뤄내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 않은가? 똑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더라도 누군가는 성공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실패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부잣집에서 태어나더라도 누군가는 성공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갈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너는 이런 인생을 살 것이야’라고 점지 받은 것일까? 노력을 해도 오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점이나 사주, 무속 신앙 등은 잘 믿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고,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그런 신비의 영역을 업으로 삼고 계시는 분들도 많으니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라고 느껴진다. 요즈음 연말이 되니 인생에 대한 이런 근원론적인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     


 물론 나도 명문대를 나왔으니 나름 축복받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집안은 어려웠을지라도, 내가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대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문대학에 와서도 여러 친구들을 만나보고 느낀점이 있다. 바로 사람마다 각자의 그릇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어떤 친구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친구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연락이 두절되어 지금 뭐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큰 분수를 사려다가 화를 입는 경우도 봤고, 또 자신보다 낮추어 사려다가 화를 입는 경우도 봤다. 도대체 우주의 무슨 법칙이 작용하길래 80억명이 사는 지구에는 80억개의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고, 또 그 삶들이 차이가 나는 것일까? 정말 누군가는 왕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고, 누군가는 노예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80억 인구가 나타난 그림

 

 고대 로마 시대 때 유행했던 철학 사조로서, 스토아 철학이란 것이 있다. 아파테이아라는 마음의 평화, 부동의 상태를 유지하며 금욕, 절제를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다. 예전에 고대 로마 5현제중 한명에 속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쓴 ‘명상록’이란 책을 읽고 내가 고민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스토아 철학의 입장, 특히 아우렐리우스의 책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겪는 인생의 희노애락이라든지 인생사에 획을 그을만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들이 우주의 무수한 법칙들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리 대본에 적힌 대사처럼 그것들을 경험 했다는 것이다. 가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이 오면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을 다시금 기억한다. ‘아, 맞아. 이것도 어차피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더 이상 노력을 할 필요도, 뭔가에 관심을 기울여서 내 열정을 쏟기도 뭔가 무의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결정되어 있고, 어차피 이미 벌어질 일들이면 내가 여기서 뭘 한다고 나에게 뭐가 더 좋은거지?’ 점차 도태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스토아 철학의 원류는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닐테지만, 내가 받아들인 스토아 철학은 나에게 양날의 검같은 존재였다. 마음의 평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운명으로 생각해버려 노력조차 안하게 만드는 바보로서 만들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삶이란 알면 알수록,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를 더욱 의문스럽게 만든다. 일반적인 인생 순서에 따르면, 나는 당장 출근을 해야하고, 일을 해야하며, 돈을 벌어야하고, 누군가를 만나 결혼도 해야한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시작해서 우주적인 관점에까지 나아가면, 삶이 지극하게 미미하게 보인다. 아직 발견되지도 않은 우주의 물질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주의 기원 역시, 빅뱅이론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영화의 대사처럼 뭣이 중헌지, 내 현재의 삶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든다. 당장 공과금을 내야하고, 친구들을 만나야 하며, 내일 출근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마음 졸이는 것들이 우주라는 거대한 관점까지 나아가면 참으로 덧없게 느껴진다. 나는 가끔 종교인을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현실적인 생각보다는 늘 인간의 운명과 삶, 보이지 않는 원리와 세상과의 교감 등이 내 흥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밝혀지지 않은 삶의 오묘한 법칙이 존재한다면,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신비한 법칙이 있다면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전쟁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아픔이 끝났으면 좋겠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소원이다. 언젠가는 티비에서 더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불행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고, 희망에서 불행의 끈을 찾기도 한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다양한 원리와 법칙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힘없고 아픈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줬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바뀌어야겠다. 풍족하진 않지만, 불우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며 때로는 봉사활동에 참여해 최전선에서 그들을 도와주고싶다. 영하를 넘나드는 연말연시의 추위에 고통받고 있을 소외된 이웃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하루 빨리 시간이 지나서, 따뜻한 봄이 다가와 그들과 함께 활짝  벚꽃을 같이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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