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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이 Mar 04. 2023

신에 대한 사색 (1)

중력과 은총

 브런치에 오랜만에 글을 올린다. 요새는 바쁘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고통의 시기를 겪었다.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산파할 때의 고통이랄까? 진리에서 다음 진리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성장통을 겪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딱히 거창하게 한 것은 뭐 없다. 다만,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흩어지고 산재되어 있던 철학적 사색들과 사상들을 단단하게 연결시키고, 그 다음에 서서히 굳혀가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생’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작업을 한 듯 싶다.  

 요즘 나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생각이 있다. 철학적 사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만물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조금은 허황된 연결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호기심에 빠뜨린 ‘만물의 연결의식’을 요새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5분 뚝딱 철학이라는, 한국외대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받으신 김필영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서 내 흥미를 돋구었던건, ‘동시성’이라는 현상에 관한 영상이었다. 칼 융이라는 학자가 주장한 내용인데, 때로 인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알고보면 서로가 맞물려 돌아가 필연처럼 보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칼 융은 어느날 자신의 머리가 이유 없이 아파오는 커다란 두통을 느꼈는데, 하필 그날 자신의 환자가 총으로 머리의 같은 부위를 쏴 자살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동시성 현상을 보면서, 문득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는 곳도 멀리 떨어져 있고, 국가도 다르고, 인생을 살면서 그들과 동시대에 같이 살아갔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 외에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실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한다. 특히, 그것이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약자들의 생애라면 무의식적으로 그들과의 연결의식이 느껴지는 것이다.      

 얼마 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커다란 피해를 입은 터키의 시민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시민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려 드는 전세계의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뭔가 모를 동질감과 연결의식이 느껴졌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현상이 조금 무섭기는 했다. 내가 머리가 휙 가버린게 아닌걸까? 몇날 며칠을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보니 어떻게 되버린게 아닐까? 하지만 그냥 두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찝찝했다. 왜냐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나는 문득 신의 섭리를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았고,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신과의 합일, 은총, 그리고 약자에 대한 연민을 계속해서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쓴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면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  대부분, 아니,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히키코모리 청년으로 살아가며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지내다 자신을 용서하게 된 ‘민’의 이야기,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처로 얼룩진 소녀를 보듬어주는 또 다른 소녀의 이야기,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없는 돈을 털어 한강에서 만난 소녀를 도와주는 한 늑대 소년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영미라는 소녀가 수지라는 천상에서 내려온 소녀의 간택을 받아 새롭게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까지. 내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의식은 바로 약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었다. 요즘은 내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들과 내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지점들을 예술적으로 표출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한다.      

 31세라는 나이에 신의 부름을 받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파하러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라는 어부가 떠오른다. 코린토스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수단의 톤즈라는 지역에서 나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갔던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참고로 종교가 없다. 얼마전까지도 나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요즘은 서서히 생각이 바뀌고 있다.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운명을 관장하는,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볼 수 있는 신이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내 가슴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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