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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이 Mar 30. 2023

내면 아이

 아주 어렸을 적에 경험했던 일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맨발로 뛰어나가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찾았던 기억이 분명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울면서 누군가를 찾았다. 가슴이 뻥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의 나는 크나큰 슬픔을 느꼈다. 그날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나를 괴롭히곤 한다.  

   

 상처받은 나와 마주하는 경험. 내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있는 어린 날의 상처들. 심리학에서는 내면 아이라 불리는 개념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독 어린 시절의 경험에 취약하다. 태어나서 청소년기까지 경험했던 일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반복했던 행동들, 매번 똑같은 인간관계의 패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방식까지,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들이 유령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종종 스스로 정신분석 해보며, 무의식의 끝까지 여행해 본 적이 있었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부분들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노트에 쭉 떠오르는 생각들을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노트의 한 두 페이지가 넘어가더니, 어느덧 노트 위는 문득, 어린 시절의 내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로 얼룩져 있었다. 특히 치유되지 않은 채 흉터로 남아있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선명하게 종이 위에 적혀있었다. 그걸 본 나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나를 비난했다.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었을까? 남들이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을, 난 왜 그렇게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 깊은 곳에 그 슬픔을 묻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 아이를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처받고 아파했을 과거의 나를 위로해줄 사람은, 지금의 나뿐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처받은 소년은 자라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는 뒤늦게나마 소년에게 화해의 악수를 건넸다. 이제서야 그때의 마음을 알아줘서 미안하다고,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하느라 대견했다고 말이다.      


 노트에 적힌 나의 모습들과 불현듯 떠오르는 유년 시절의 상처들. 때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분명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때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비로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은 과거의 나를 홀로 놓아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사랑하기로, 내 아픔까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참으로 용감했다고, 누구보다 강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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