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들어지는 이유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는 진상 학부모가 유전자에 박혀 있는 성격적인 결함으로 인해 발현되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진상 학부모는 일부 사람들의 강박이나 우울로 인해 나타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며 따라서 지극히 정상적이며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본인은 진상 학부모가 될 수가 없다 굳게 믿는다. 혹은 일부 연령, 일부 성별에만 해당하는 일이라 정의하고 본인은 대상자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진상 학부모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물론 학부모라면 말이다. 결혼을 히지 않은 미혼 외삼촌들도 진상 학부모의 대열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으니 학부모가 아니어도 진상 학부모가 될 수 있긴 하다. 여기에는 불행하게도 글을 쓰는 ‘나’도 포함된다. 나는 학령기 아이들을 둔 엄마이므로 예비 진상 학부모이거나 이미 진상 학부모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평범한 부모가 진상 학부모로 거듭나게 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육아는 어렵다. 특히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은 더 어렵다. 인생에 재미난 것이 넘쳐나는데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자니 달리 세상과 소통할 일은 없고 예정된 수순처럼 인터넷 속 비교지옥에 빠져든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이야기이므로 읽는 사림에 따라 나는 안 그랬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혼자나 딩크가 넘쳐나는 세상에 아이를 낳았다는 건 어느 정도 사회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모범적인 구석이 있었다는 뜻이니 이왕 낳았으면 잘 키워보자 생각하며 책도 읽고 훌륭한 사람들의 영상도 찾아본다. 잘해 본다고 시작한 일인데 열심히 볼수록 이상하게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너무 몰라서, 내가 부족한 인간이어서 육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자책한다.
자책의 결론은 육아를 외주에 맡기는 것이다. 아이를 영상과 핸드폰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균형 잡힌 식단과 규칙적인 생활과 사회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전문적인 육아를 해 줄 수 있는 기관을 찾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달의 민족이라는데 나는 오히려 외주화의 민족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로시간이 OECD 평균보다 길다는 뜻은, 그 시간에 돈을 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시간은 없고 돈이 있으므로 사적인 영역의 일을 어쩔 수 없이 외주화 하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의미이다. 결과적으로는 나는 돈을 주고 외주화를 시킨 부분에 대해 고객님으로 대접받는 일 역시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육아를 외주화 하는 것은 심지어 국가주도라서 나에게 돈이 없다 하여도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아이를 맡길 수가 있다. 돈을 내지 않았는데도 나의 아이를 맡겼다는 이유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고객님이 될 수 있다는 뜻이디.
처음에는 아이를 맡아주는 사람들에 대해 한없이 고마운 마음만 갖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아이를 맡기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는지 의심이 된다. 선생님과 잦은 소통을 하고 아이에 대해 세세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도리라 생각한다. 어려운 줄 알았던 보육기관의 선생님들은 어떤 요구에도 친절하게 답해주고 심지어 부모들의 마음마저 읽어준다.
내가 선생님에게 하는 세세한 요구들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며, 혹시 진상이 될까 아주 약간 고민이 되더라도 설사 내가 진상이 되더라도 우리 아이를 위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 된다는 잘못된 모성애를 발휘하게 되니, 보육기관의 선생님들이 해줘야 하는 배려의 목록은 점점 길어지게 된다.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이제 부모들은 교사들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 상태에서 학부모가 되어 버린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부모는 학부모가 된다. 그렇지만 학교에 돌봄에 늘봄까지 맡겨버리는 상태이다 보니 부모들은 학교가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착각의 지분에는 또 국가의 몫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학교는 보육기관이 아니다. 교사의 역할에 보육은 없다. 교사는 교육을 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하는 사람이다. 평가란 무엇인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학생들의 수행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어떤 특혜가 개입해서는 안된다.
우리 아이의 이런저런 사정이 평가 결과에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초등에서 점수가 안 나온다고 교사에게 평가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정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교사들은 편견 없이 학생을 판단하고 교육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교사들이 호의를 베풀지 못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아이에게만 특별한 배려를 해달라 요청하는 요구들을 거절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학부모의 요구가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친구에게 보내는 것처럼 채팅 창에 적고 전송하기만 하면 되고 심지어 이건 둘 사이의 대화인지라 다른 사람에게는 공개되지도 않는다.
퇴근 이후로 학부모의 연락을 받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다. 투폰 같은 게 문제가 아니다. 투명하지 않은 학부모의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교사들의 요구와 보고는 맞춤법 자리 하나까지도 공식화하면서 우리가 받는 요구는 왜 이다지도 비공식적이어야 한단 말인가. 공식적인 문서는 그냥 귀찮기만 한 서식만 요구하는 게 아니다. 왜 있지 싶은 칸들을 채우며 불필요한 말은 빼고 정제된 내용만 기입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채팅도 전화도 안된다 그럼 학부모와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을 수 있다. 스마트 스토어에 CS 게시판이 있지 않은가. 비밀 글로 올리고 비밀 글로 댓글을 달 수 있다면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굳이 게시판이어여 하는 이유는 최소한 누가 몇 회 정도의 게시물을 올렸는지 정도는 비밀 글을 열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개 교사가 이 정도 생각했으니 소통을 공식화하는 방법은 집단지성을 모으면 금방 해결된다. 단, 교육부, 교육청, 교수 말고 교사들의 집단지성어야 한다.
나는 최근의 불행한 사태를 알리는 기사들의 댓글이 몹시 불편하다. 댓글 속의 많은 사람들은 맘카페라 불리는 특정 집단을 비난하며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려 버린다. 그러나 평범하고 교양 있는 인간도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진상 학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
학교가 보육기관이라 착각하게 하지 마라. 학교는 교육기관이다.
교시와 학부모간에 이루어지는 개인 채팅 형태의 모든 소통 방식을 금지하라.
학부모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본인은 담임 선생님에게 일 년에 메시지를 한 번도 안 보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하면 너무 불편하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교사들이 죽어가고 있다. 교사를 괴롭게 만들었던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조차 자신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싹을 잘라 버리자고. 내가 교사라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진상 학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