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대한민국 평균 통근 시간 73.9분1). 우리나라 직장인은 하루 약 1시간 14분을 출퇴근을 위해 길 위에서 보낸다. 워낙 오랜 시간을 대중교통에서 보내기 때문일까, 출퇴근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쉽게 지친 기색을 읽을 수 있다. 때로는 그 고단함이 표정에만 머물지 않고, 이동하는 동안만큼은 어떻게든 편안하게 있고 싶다는 욕구로—행동으로—드러나기도 한다. 서울과 인근 수도권을 잇는 광역버스는 대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시간 남짓, 꽤나 긴 시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 시간 동안 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굳은 의지가 보일 때가 있다.
안쪽 자리를 비워둔 채 바깥 좌석에 앉아 있는 모습. 내 옆에 아무도 앉지 말라고 선언하는 듯한 모습을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는 그 자리마저도 모두 차버리고 마는데, 그럼에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꿋꿋하게 바깥 자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난 이따 일찍 내릴 거라 바깥 자리에 앉아야 돼.’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
그렇게 비집고 들어간 자리에선 서로 닿지 않으려 어깨를 말고 앉아 팔꿈치를 바짝 접는다. 그리고 시선은 작은 휴대전화 화면에 고정시킨다. 바깥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는 이어폰 착용은 필수다. 옆사람의 숨소리, 코 훌쩍이는 소리, 버스 엔진 소리 같은 것들을 굳이 듣기 싫으니까―아, 통화 소리는 정말 최악이다. 피곤한 출퇴근 시간에 쪽잠이라도 자 둬야 하루를 버틸 수 있기에,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잠을 청한다.
그렇게 도착한 회사에서 8시간(혹은 그 이상) 노동한 뒤, 다시 올라탄 대중교통에서는 자리 이웃과의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진다. 불편한 퇴근길이 끝나고 나면, 이젠 정말 해방!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과 함께 사는 아파트, 오피스텔, 빌라로 들어간다. 지금처럼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과 이토록 가까이 산 적은 없는 듯하다. 한 건물에 몇십 가구가 살고, 한 가구용으로 나온 집을 불법 개조하여 두 가구가 나누어 살기도 하니까 말이다. 지하철과 버스에서도 타인과 과도하게 밀착한 채 이용하는 경우가 잦다. 여느 때보다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요즘, 왜 우리는 필사적으로 타인을 비가시화하려 하는 걸까. 왜 타인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편이 더 편해졌을까. 왜 내 옆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불편해진 걸까. 왜 세상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필요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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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옆자리를 지키려는 이 작은 신경전은 ‘대중교통 예절’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불편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지나치게 밀집해 있고, 노동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통근 시간도 길다. 그만큼 현대인의 일상은 늘 피곤하다. 피로가 쌓일수록 우리는 타인을 견딜 여유를 잃고, 결국 타인을 차단하는 기술을 ‘살기 위해’ 익히게 된다. 출퇴근 시간과 노동터에 나설 준비 시간을 포함하면 우리는 주 5일 동안 하루 약 10시간을 노동에 쏟아붓는 삶을 살고있다.
타인을 차단하는 행위는 예민함이 아니라, 이 피로한 도시에서 버티기 위한 생존전략이 된다. 이어폰은 내가 선택한 소리만 남기고, 그 밖의 소리는—말소리든 웃음소리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든—한꺼번에 ‘소음’으로 재분류해 지워버린다. 휴대전화 화면은 시선을 붙잡아 두고, 버스에서 선점한 바깥자리는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계선을 명시적으로 긋는 듯 하다. 그렇게 확보한 작은 통제의 공간은 잠깐의 평온을 주지만, 동시에 공공의 공간을 수많은 작은 개인실로 쪼개며 서로를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혹은 ‘잠재적 방해물’로 재정의한다. 이런 접촉 최소화는 흔히 개인주의로 불리지만, 여기서 이는 어떠한 신념이라기보다 관계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어적 기술에 가깝다.
따라서 이 태도는 개인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개인에게 떠넘긴 피로를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이 선택한 일종의 ‘관리 방식’에 가깝다. 관계를 맺고 감정을 조율하는 일은 늘 에너지를 요구한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적당한 말투를 고르고, 불쾌하지 않게 거리를 맞추는 일—그 사소한 조율이 반복될수록 일상은 더 쉽게 소진된다. 그러니 피로한 도시의 사람들은 직장 내 관계, 가족, 정말 가까운 몇몇 친구처럼 ‘유지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관계에만 힘을 남겨둔다. 그 밖의 사사로운 접촉은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무수한 사람들이나 식당 옆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그 점에서 완벽한 타인이다. 서로의 이름도, 저마다의 사정도 모른 채,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잠깐 공유할 뿐, 내 삶에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한정된 나의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행동을 최소화한다. 눈 마주치지 않기, 말 걸지 않기, 불필요한 접촉 만들지 않기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로 읽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동 교정은 타인을 존중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의 가능성을 미리 닫아두는 기술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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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키오스크 없는 매장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사람에게 직접 주문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의되고 있을까?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서비스인 요식업을 예로 살펴보자. 출근 전에 들른 매장에서 직원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주문을 건네던 시간은 키오스크와 어플리케이션 주문이 대체했다. 이제 말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불필요한 과정’이 되었다. 굳이 눈을 맞추지 않아도 되고, 굳이 내 목소리를 꺼내지 않아도 되며, 굳이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 변화는 많은 현대인에게 카페인이 노동을 위한 연료를 채우는 루틴이자 일종의 의식이 된 지금, 커피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커피숍인 스타벅스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스타벅스가 오랫동안 내세워온 마켓팅의 핵심은 ‘고객 경험’ 제공이다. 이러한 경험은 친절한 분위기와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원이 주문을 직접 받고, 음료가 나오면 고객의 이름이나 닉네임을 불러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고객 경험 향상 마케팅의 예이다. 샷 수나 시럽, 우유의 종류 등을 고객이 직접 선택하는 서비스 제공은 단순히 옵션을 늘리는 기능이 아닌 고객이 “내가 원하는 걸 알아봐준다”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렇기에 본사 차원에서는 직원이 주문을 받고 이름을 불러 소통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둔다. 그러나 타인과의 소통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적 행위가 된 지금, 이 경험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스타벅스 코리아가 2014년 5월 도입한 사이렌 오더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커스텀하는 서비스는 유지한 채, 그 밖의 과정—줄서기, 말 걸기, 되묻기, 잠깐의 어색함—을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타벅스가 강조해 온 ‘친절한 경험’이 사람을 통해 구현되던 방식에서, 어플리케이션을 통한 구현으로 그 방식이 옮겨간 셈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일부 이용자에 그치지 않았다. 2025년에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사이렌 오더 누적 주문은 5억 건을 넘겼고, 전체 주문의 35%가량을 차지한다고 한다. 브랜드가 소통을 원칙으로 내세우더라도, 일상의 속도와 피로 속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주문’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다.
흥미로운 건 이 변화가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2018년 조선비즈 기사를 통해 당시 사이렌 오더가 전체 주문의 약 15% 수준으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비대면 주문은 처음부터 압도적인 표준이라기보다, 바쁜 일상에서 커피를 주문한 뒤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거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필요를 조금씩 흡수하며 커진 하나의 방식에 가깝다. 그런데 그 비중이 커질수록 편의의 의미도 달라진다. 단순히 시간을 아끼는 도구를 넘어, 관계를 거치지 않고도 주문 과정을 무리 없이 끝낼 수 있는 경로로 인식된다.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한 타인과의 대화가 불필요해진 주문은 우리 일상 속 관계 생략과 맞바꿔 얻어진 결과이다. 이와 같은 방식이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직원은 더이상 상호작용하는 사람이기보다 앱을 통해 주문한 서비스를 건네는 마지막 단계로 남고, 내 일상을 막힘없이 굴리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비슷한 변화는 점원과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서브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브웨이는 빵, 치즈, 야채, 소스 등 여러 옵션을 고르고, 넣을 것과 빼고 싶은 것을 직원에게 말로 전달하는 주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주문 자체가 짧은 대화로 이루어지는 셈인데, 이 과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질문을 따라가며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고, 뒤에 줄 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에너지 관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상호작용은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은 과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실제로 온라인에서는 서브웨이가 ‘내향인이 가기 힘든 곳’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비자의 반응을 의식한듯, 서브웨이는 2024년 인기 조합을 미리 정해 두고 한 번에 주문할 수 있는 ‘썹픽(SubPick)’을 처음 선보였다. 재료를 하나씩 말로 고르지 않아도 되도록 주문 과정을 줄이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주문을 끝낼 수 있다는 썹픽의 마켓팅 문구는 주문을 위해 필요했던 대면 대화를 줄이려는 요구가 커졌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편리함은 분명 피로를 덜어준다. 다만 그만큼 우리는 일상 속 마주하는 타인과 잠깐이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짧은 인사, 작은 배려, 애매한 침묵을 견디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버린다. 서비스 제공자는 더 이상 말을 섞는 상대라기보다 매끄럽게 작동해야 하는 시스템의 일부로 인식된다. 그렇게 일상적 접촉이 기능적 요소로 인식될수록, 공공의 공간에서 마주치는 타인 역시 ‘사람’이라기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감지되기 쉽다. 특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예상치 못한 소리, 계획을 흐트러뜨리는 움직임처럼 말이다.
필자가 경계시하는 지점은 이런 관계의 삭제와 무시가 개인의 심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는 것보다, 불편의 원인을 나의 일상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삶의 기본값이 된 듯 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고, ‘내가 불편하지 않을 권리’가 현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 듯 하다. 이러한 시대정신이 주류가 된 사회의 공공의 규칙은 배려의 이름이 아닌, 취향과 효율의 이름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이 변화가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의되는 순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의 배제는 정당성을 얻게 된다. 내가 불편하다는 감각은 내가 선택할 자유로, 조용히 쉬고 싶다는 바람은 들어올 사람을 고르겠다는 원칙으로 바뀐다. 그렇게 사적인 감각이 공적인 기준이 되고, 개인의 방어가 사회의 운영 원리가 된다. 이 사고방식은 한순간에 퍼지지 않는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일상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도 흔해진 ‘공지’와 ‘표지판’을 통해 배제와 통제가 일상의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게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유로 영어 메뉴판만 제공하고 한국어 설명은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여, 작은 글씨를 읽기 어려운 노년층을 사실상 배제하는 경우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확인할 수 있듯 배제와 통제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그 방식도 한층 정교해진다. 이런 공지들은 대개 질서나 쾌적함, 운영상의 효율을 이유로 내세운다. 이를테면 ‘조용한 공간 유지를 위해 대화를 자제해 달라’거나 ‘통화는 삼가 달라’는 문구, ‘키오스크 주문만 가능’ 또는 ‘QR 주문 필수’ 같은 안내가 그렇다. 겉으로는 모두 매장을 편하게 운영하기 위한 규칙처럼 보이지만, 그 규칙을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용자 범주에서 밀려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점점 구체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통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불편을 줄이기 위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배제의 기준이 누적되면, 그것은 개별 가게의 운영 방침을 넘어 사회가 특정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연결된다. 특히 국적을 기준으로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 논점은 ‘매장 운영의 편의’가 아니라 차별과 혐오, 그리고 공공성의 문제로 이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노키즈존과, 최근 논란이 된 성수동의 중국인 출입 금지 카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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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을 둘러싼 담론도 앞서 말한 사회적 문법 위에 있다. 아이가 시끄럽다, 사고가 걱정된다, 다른 손님이 불편해한다. 표면적으로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다. 실제로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서도 노키즈존으로 파악된 사업장 가운데 조사에 협조한 205개소의 업종은 카페·휴게음식점·제과점 등에 많이 분포했고, 갈등은 우리가 자주 드나드는 일상 공간에서 반복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다만 노키즈존을 두고 흔히 따라붙는 말도 있다. 아이가 문제라기보다, 문제 상황을 방치하는 양육자가 문제라는 주장이다.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절이 있고, 그 예절을 가르치지 않는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 역시 이 지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출입 금지’가 곧바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소란이나 사고 가능성은 관리의 문제인데, 노키즈존은 그 책임을 관리가 아니라 배제로 처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부 사례를 근거로 모든 아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고, 그 범주 전체를 공간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동의 출입을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차별로 보고 개선을 권고해 온 사례들은, 이런 조치가 운영상의 재량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노키즈존은 안전을 위한 규칙이라기보다, 점주와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불편의 가능성을 사람째로 지우는 규칙이 되기 쉽다. 문제를 만든 당사자를 가려 책임을 묻기보다 문제의 가능성을 가진 집단을 통째로 없애는 방식이 ‘상식’처럼 굳어지는 순간부터 상황은 더 위험해진다.
이 감각이 위험한 이유는 배제의 기준이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쉽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소란 가능성’을 이유로 출입을 막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면, 다음에는 다른 집단도 같은 방식으로 배척될 수 있다. 노키즈존이 ‘쾌적함’을 이유로 한 배제라면, 성수동의 중국인 출입 금지 카페 논란은 그 배제가 국적이라는 정체성으로 옮겨간 사례다. 성수동의 한 카페는 SNS에 ‘We do not accept Chinese guests(우리 가게는 중국인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올렸고, 논란이 커지자 “반중 정서로 인한 불편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사회 분위기가 완화되면 다시 중국인 손님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 분위기’라는 말은 여기서 책임을 흐리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대신, 특정 국적 전체를 잠정적 문제로 만들어 놓고 그 배제를 ‘불편 관리’로 설명한다. 결국 국적을 기준으로 사람을 범주화하고, 그 범주를 통째로 손님에서 제외하는 방침을 정당한 운영 언어로 꾸민 셈이다.
문구가 알려진 뒤 차별이라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진정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되면서 면담 절차가 진행됐다. 면담 이후 공지는 철회됐다. 이 과정은 ‘가게의 선택’이라는 말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출입 제한이 개인의 취향이나 자율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운영 방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를 고르는 순간,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선별이다. 불편을 덜어내는 가장 쉬운 방식이 사람을 범주로 지우는 일이 되어버릴 때, 혐오는 감정이 아니라 규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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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소진된 개인들이 얼마나 쉽게 ‘내가 불편하지 않을 권리’를 앞세우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노키즈존이나 중국인 출입 금지 카페는 모두 불편을 관리하겠다는 명분으로 등장하지만, 그 방식은 문제를 조정하거나 책임을 묻는 쪽이 아니라 사람을 미리 걸러내는 쪽으로 기운다. 편의를 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은 누군가를 공간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점점 더 거친 형태의 배제를 정당화한다.
문제는 이 감각이 개인 차원의 푸념에 머무르지 않고, 공지와 규칙, 운영 방침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나는 불편하지 않고 싶다”는 말이 “그러니 너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 불편을 견디지 않으려는 태도는 곧바로 폭력이 된다. 타인과 함께 쓰는 공간에서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마찰과 책임은 사라지고, 대신 선별과 배제가 관리의 기본값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공존을 연습할 기회 자체를 스스로 줄여 나간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자는 말은 너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필자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그 뻔한 말이 사라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다. 불편을 이유로 사람을 지우는 사회는 결국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오늘은 아이와 특정 국적이 배제되지만, 내일은 다른 누군가가 같은 이유로 밀려날 수 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불편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발생하는 불편 속에서도 타인을 사람으로 대하는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조금 불편해질 각오를 하는 대신, 너무 쉽게 누군가를 내쫓는 사회를 선택하고 있는 건 아닐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