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 유라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당신과 함께라면,
그냥 그렇게 걸어볼래요."
<사랑의 불시착, 윤세리 대사 中>
당신은 로맨스를 좋아하는가. 상대를 위한 헌신이 희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 상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싶은 마음,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닳아 빠진 사랑의 순간들을 농축해 담아둔 영화와 드라마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사랑’을 신봉하게끔 만든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손해를 봐도 좋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시작이야. 손해를 보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을 때. 계산기 자체가 두드려지지 않을 때.
속이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을 때."
<연애의 발견, 남하진 대사 中>
미디어 속 사랑을 좇다 보면 결국 사랑은 손해 보는 것, 이조차 손해나 희생으로 느껴지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손해조차 아깝지 않은 낭만적인 사랑이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주입한 로맨틱한 환상은 교제폭력의 전조 증상까지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버린다. 상대에게 완전히 매몰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믿게 되는 순간 범죄와 사랑을 구분할 능력을 잃게 된다. 달콤한 미디어 속 로맨스가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듦과 동시에 뉴스와 SNS에서는 끔찍한 교제폭력 사건들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다. 분명 우리 또한 이런 사건들을 접하며 가해자의 잔혹함에 분노하고, 피해자의 사연에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역설적이게도 당신 마음 한 편엔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묘한 확신이 있지 않은가?
2024년 8월부터 2025년 7월까지 교제폭력으로 2회 이상 신고한 건수는 총 1만 3,327건, 2024년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은 180명.
여성가족부(現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4년 여성 폭력 실태조사’ 결과, 평생 한 번 이상 여성 폭력 피해를 경험한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36.1%. 피해 당시 나이를 살펴보면 성적 폭력의 경우 20대가 44.4%로 가장 많았고 30대(20.6%), 10대(18.9%) 순이었다. 아직도 교제 폭력이 당신과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가? 숫자가 증명하듯 교제폭력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당신이 가장 취약한 순간 찾아온다. 사랑이면 뭐든지 괜찮을 것 같은 바로 그 순간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사랑이라는 환상 너머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고자 한다.
"나랑 같이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中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대사.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소지섭, 임수정 주연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명대사이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함께 탄 차를 거칠게 몰며 내뱉은 이 대사를 두고 당시엔 ‘절절한 사랑 고백을 죽음에 비유했다’, ‘터프한 사랑 고백이 인상적이다’라는 호평이 쏟아졌고 이 대사는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이 대사는 충분히 상대방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상대방이 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위협적인 말까지 꺼냈다면 ‘교제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를 가슴 설레게 만들었던 영화나 드라마의 클리셰적 장면들을 떠올려 보자. 이런 클리셰들은 아직도 당신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가?
- 싫다고 말하는 상대방의 팔목을 잡아끄는 주인공
- 고성이 오가는 일명 ‘사랑싸움’
- 상대를 강제로 둘러업고 유유히 걸어가는 주인공
- 상대를 벽에 밀쳐 가둔 채 사랑 고백을 하는 주인공
- 무턱대고 집 앞에 찾아가 상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주인공
- 상대의 동의 없이 ‘제 여자 친구예요’라고 선언하는 주인공
-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강행하는 주인공
로맨스 장르를 싫어하지 않는 이상 분명 한 번쯤 본 적 있는 장면일 것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웹툰, 소설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으로, 주로 설렘을 가중하는 포인트 장면으로 삽입되어 소비자들에게 꾸준히 ‘심쿵’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일곱 개의 장면은 웹매거진 ‘아이즈’와 국제 앰네스티가 함께 진행한 캠페인 '#더이상설레지않습니다'에서 제시한 ‘한국 드라마 속 로맨스의 폭력적 클리셰 10’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줄곧 ‘터프함’, ‘박력’, ‘나쁜 남자’ 등이라는 좋은 포장지에 싸여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져 왔다. 겉으로 보기엔 거칠어 보이지만 아직 미성숙하고, 마음은 여린 왕자님 같은 남자처럼 말이다. 높은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인 <꽃보다 남자>나 <시크릿 가든>의 남주인공도 엄청난 부자에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는다. 비교적 여주인공은 힘이 없고 근근이 생활을 이어간다. 이 둘이 이어졌을 때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과의 교제를 강요하고 스킨십을 강제로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오랫동안 ‘설렌다’, ‘상남자다’라는 등의 반응이 대다수였다.
이는 비단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최근 큰 인기를 얻은 연애 프로그램 <환승연애 4>에서 남자 출연진이 자리를 떠나려는 여성 출연진의 팔목을 부여잡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여성 출연진이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하지 말라 소리치긴 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 파트너의 팔목을 붙잡는 남성’과 같은 장면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는 것이다. 해당 장면을 제외하더라도 해당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우리가 줄곧 접해오던 로맨스 드라마, 영화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는 결국 어릴 때부터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연애에 대한 고정적인 행동을 무의식에 습득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앞서 언급한 폭력적 클리셰와 같은 행동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미디어 속 ‘교제 폭력’을 ‘사랑’이라고 정당화 당하며 살아왔다. ‘폭력’을 멋있고 당연하고 마치 ‘드라마 속 장면’처럼 여기며 남자들은 폭력적 남성상을 멋있는 것으로, 여성들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콘텐츠들의 인기는 꾸준하다. 심지어 마피아 보스에게 납치당해 감금되어 학대당하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인 <365일>은 속편 제작까지 확정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맨스 서사 속 교제 폭력들이 다양한 명색 하에 낭만화되고 있다. 도대체 왜 미디어에선 이런 종류의 로맨스가 끊임없이 쏟아지는가. 먼저 콘텐츠란 결국 ‘시청자의 주목도’에 의해 목숨이 좌우된다. 또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것,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며 자극적인 장면들이 추가되면 더욱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콘텐츠는 그 사회의 수많은 요소를 반영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교제 폭력 인지 감수성이 아직 부족한 것 또한 이에 한몫한다.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팀 2023년 발표한 교제 폭력 인지 감수성 조사 결과, 여성(62%)이 남성(47%)보다 인지 감수성이 높았으며 이는 연령층이 높을수록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사랑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게, 헌신하는 게, 눈 감아야 하는 게 당연해진다면 결국 우리는 교제 폭력의 위험성을 망각하게 된다. 최근 들어 다양한 논란들이 불거지며 대중들의 인식이 비교적 민감해졌지만, 아직 사랑이라는 면죄부 아래에 수많은 폭력이 허용되고 있다. 일상 대부분의 시간을 콘텐츠 시청에 쏟는 시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로맨스라는 단어로 포장된 폭력들은 더욱 빠르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스며들고 있다. 이는 결코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며 당연하게 넘겼던 행동들은 진정한 사랑 표현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상대의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신체를 통제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명백한 폭력이며 범죄다. 사랑은 공포를 동반해선 안 된다.
‘교제폭력’1)은 교제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성적, 정서적 폭력, 통제, 스토킹 행위를 말하며, 이별 과정 또는 이별 후에도 지속되는 폭력을 포함한다. 이러한 교제 폭력은 단순히 신체적 폭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유형의 폭력이나 통제까지 포함된다. 교제 폭력의 대상은 부부 사이가 아닌 이성 간에 발생하는 범죄로, 아직 동성 연인을 포함하는 견해와 포함하지 않는 견해가 나뉘어 있다. 특히 가스라이팅이나 강압적 통제의 경우 외부에서 인지하기 어려우며,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특징을 보인다. 그렇기에 교제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한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3년간 교제폭력 관련 범죄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2022년 7만 790건, 2023년 7만 7,150건, 2024년 8만 8,394건으로 나타난다. 2024년 기준, 하루 평균 229건의 교제 폭력 신고가 접수되었다. 경찰청에서는 실제로 교제 폭력 예방을 위해 ‘연인 간 폭력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하거나 ‘교제 폭력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했다. 그럼에도 교제 폭력 범죄 건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연인 혹은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라는 교제 폭력의 특성상, 실제로는 측정된 신고 건수보다 더 많이 발생했을 것이며 현재도 발생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교제폭력의 유형별 현황을 알아보자. 2024년 기준 범죄 유형별로는 폭행·상해가 75.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협박·공갈(70.0%), 손괴(67.2%), 체포·감금(36.5%), 주거침입(34.1%), 강간·강제 추행(16.1%), 디지털 성폭력(5.4%) 순이다. 또한 2024년 친밀관계 폭력 범죄자의 75.7%는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24.3%로, 이러한 교제폭력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다. 교제폭력의 여성 피해자 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의 가장 큰 이유로는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으로 남자가 여자를 소유물로 보고 행동하는 것과 신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보편적으로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제폭력 신고 건 중 절반은 철회된다. 현행법상 교제폭력 사건의 입건 여부는 사건의 신고 접수 후 수사 중에도 피해자의 처벌 의사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 경찰청이 올해 2월 7일부터 13일까지 일주일간 교제 폭력 112신고 1,129건을 분석한 결과, 이중 절반인 50.6%(신고 단계 36.2%·수사 단계 14.4%)가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 종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교제폭력 범죄는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로, 상대방과의 인적 관계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취소하는 경우가 대부분 발생하는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1) 가스라이팅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기대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랑으로 치유받길 원한다. 동국 교지에서 20대를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연애하고자 하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의지할 상대가 필요해서’라는 응답의 비율이 42.1%, 두 번째로 높았다. ‘기간제 베프’라는 말이 있듯 사랑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꺼내놓기 마련이다. 그렇게 점차 가까워지고 서로를 신뢰해 가는 과정이 건강한 사랑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가장 취약할 때, 그 틈을 파고드는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1983년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한 단어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상대가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점차 상대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정서적 학대를 의미한다. 연극 중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켜놓고, 어둡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네가 잘못 본 것”이라며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이에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 인지능력을 의심하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
2020년, 4개월간 교제한 남자 친구 A 씨와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던 중, 피해 여성 B 씨는 지속적인 통제와 폭력에 노출됐다. A 씨는 B 씨의 7년간 교제했던 전 연인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전 남자 친구에게 했던 것보다 더 잘해주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폭행했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B 씨에게도 과거를 근거로 음주를 강요했다. 폭행 이후 B 씨는 보복이 두려워 즉시 집을 벗어나지 못하다 A 씨가 잠든 틈을 타 다음 날 오전 9시쯤 방에서 빠져나와 112에 신고했다. 앞서 B 씨는 지난 8월에도 비슷한 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했으나 가해자의 사과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B 씨는 연인 관계라는 이유로 상황을 합리화하며 가스라이팅에 노출됐고, “폭력을 행사할 때를 제외하면 잘해줬다”라는 기억에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끔찍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음에도 가스라이팅은 매우 치밀하고도 교묘해 우리의 무의식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이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래는 가스라이팅 가해자에게 나타나는 5가지 특징이다.
① 거짓말을 한다.
가해자는 사실을 숨기고 왜곡해 피해자에 대한 통제력을 얻거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가해자는 노골적이거나 교묘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우는 가해자에게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그 사실을 계속 부인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② 자기 잘못을 피해자에게 투영한다.
가해자는 ‘투사’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가해자는 자신이 피해자고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모욕이나 무관심 등으로 피해자가 분노하게 만들고, 피해자가 화를 내면 ‘우리 관계를 망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라는 식으로 말한다.
③ 피해자에게 미쳤다거나 너무 예민하다고 말한다.
가해자들은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 관계를 망치는 것은 피해자이며 너무 예민하고 작은 것에 과민 반응한다는 식으로 피해자의 정신 건강을 비난하기도 한다. 때로는 피해자의 가족 및 친구에게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불안하다고 하며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
④ 피해자를 깎아내린다.
피해자가 약점을 드러내면, 곧바로 그 약점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집중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피해자를 통제하려 한다. 가해자는 농담이라는 핑계로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를 성과나 능력에 대해 모욕하거나 비꼬는 칭찬을 한다. 예를 들어 뒤에서는 사치품을 사도록 설득하고 가족 앞에서는 피해자가 사치스럽다고 비난하고 재정 관리에 무능하다고 느끼게 해 피해자의 재정, 계획을 통제한다.
⑤ 피해자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동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피해자의 잘못으로 돌리며 피해자의 문제라고 말한다. 피해자의 모든 말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며 사실을 왜곡해 피해자의 판단력을 흐려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이 불가하게 만든다.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판단력은 끝까지 피해자의 발목을 붙잡아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가스라이팅과 같은 정서적 폭력은 쉽게 인지하기 어려워 더욱 위험하다. 이는 폭력이나 성범죄와 같은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스토킹
좋아하는 마음이 죄가 될 수 있나요? 죄가 될 수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가 아니라,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더 이상 찍지 않아야 한다. 당신에게 집착의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도 상대가 거부 의사를 밝혔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그건 더 이상 ‘집착’ 정도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범죄’로 규정된다. 스토킹 행위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 또는 그의 동거인이나 가족에 대해 원치 않고 방해 또는 위협이 되는 접근, 관찰, 행위 등을 함으로써 상대에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예시로는 계속 만날 것을 강요하거나, 성관계 사실을 공개, 행동 제한 및 생활공간을 침범하는 행위 등이 있다.
이러한 스토킹 범죄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스토킹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여러 유형의 범죄를 복합적으로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2013년 - 2020년까지 선고된 법원의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스토킹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사건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강간, 상해, 폭행, 협박, 주거침입, 업무방해 등 다양한 신체 폭력이나 성폭력 범죄를 동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토킹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스토킹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극히 심각한 범죄”라며 “해외 연구 등을 보면 통상 살인사건 중 30% 비율로 범행 이전 스토킹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가해자들이 강한 집착과 소유욕을 스토킹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자신이 도저히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함을 알게 되더라도 이를 못 받아들이고 살인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
2021년 3월 23일, 온라인 게임을 통해 알게 된 여성을 수개월간 집요하게 스토킹해 온 김태현(당시 24세)은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피해자 자택에 퀵서비스 기사로 위장해 침입한 뒤 피해 여성 A 씨와 여동생, 어머니까지 세 명을 살해했다. 김태현은 2020년 말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통해 A 씨를 알게 된 이후 일방적으로 교제를 요구하며 반복적인 연락과 자택 방문을 이어갔고, 차단 이후에도 사진 속 택배 주소를 단서로 거주지를 알아내 스토킹을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가 연락을 거부하자 장시간 집 앞에서 기다리거나 동선을 파악하는 등 집착적인 행동을 반복했으며, 범행 전에는 살인 방법을 검색하고 피해자의 생활 패턴을 사전에 확인하는 등 스토킹을 지속했다. 이후 범행 당일 흉기를 훔쳐 A 씨의 여동생과 어머니, 귀가한 A 씨를 차례로 살해했다.
스토킹 범죄가 피해자들에게 남기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피해 그 이상이다. 관련 연구를 보면, 피해자 대부분은 일상 자체를 위협받는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 스토킹 피해자 256명을 대상으로 스토킹 피해 후유증을 조사한 결과, 심각하다고 응답한 정도가 신변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88.4%로 가장 많았으며 타인에 대한 혐오, 불신감이 80.4%, 죽고 싶다는 생각이 80.4%, 스토킹 피해 재발의 두려움 순으로 높았으며 대인기피 증상이나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절반 이상으로 드러났다. 길을 걷고, 집에 들어가고, 휴대폰 알림이 울리는 순간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생각할 만큼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토킹 피해자의 절반 이상은 혼자 외출하지 못하고, 공공장소 이용에 공포를 느끼며, 대인기피 증상을 겪기도 한다. 전쟁이나 대형 재해 경험 후에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현재 시행되고 있는 스토킹 처벌법은 미비하며 더욱 보완이 필요하다. 급 응급조치나 잠정조치를 불이행하더라도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의 솜방망이 처분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분이 지속된다면 스토킹은 계속해서 위와 같은 중대범죄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리적, 정서적 범죄로부터 더욱 심각한 교제 폭력 사건이 파생된다. 실제로 많은 교제 폭력이 위 사례처럼 스토킹이나 가스라이팅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이후 폭행, 강간, 살인 등의 강력범죄로 발전하곤 한다.
3) 폭행 및 살인
‘거제 교제폭력 사건’을 들어보았는가? 해당 사건은 경남 거제에서 남성 A가 전 여자 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동창으로, 2022년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A는 교제 기간 내내 피해자의 얼굴을 때리는 등의 폭력을 반복해 왔다. 결국 2024년 피해자가 문자로 헤어지자고 통보하자 A는 그날 10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며 연락이 되지 않자, 결국 범행을 결심한다. 그는 이전에 알고 있던 집 비밀번호를 이용해 새벽 시간대 피해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 잠든 피해자의 목을 조르고 머리와 얼굴을 수차례 가격했고, 피해자는 경막밑출혈 등의 중상을 입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해자는 10일 뒤 다발 장기부전으로 숨졌다.
교제 폭행으로 인한 여성들의 사망사건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교제 폭력 범죄 유형 중 꾸준히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범죄 유형은 여전히 폭행 및 살인이다. 해당 유형에는 재물 손괴, 폭행, 감금, 구타 등이 포함되며 폭력의 강도가 더 심해지면 결국 위 사례처럼 살인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심지어 당사자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가족까지 폭행 혹은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2025년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5년 여성 폭력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친밀관계 폭력 범죄로 5만 7,973명이 검거되었으며 살인·치사 범죄로는 219명이 검거되었다. (지난해 205명) 이 또한 가해자는 남성이 75.8%로 여성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또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살인 사건 중 약 10%가 연인 관계에서 발생했으며, 연인 살인 가해자 중 상당수가 세 차례 이상 전과를 가진 재범 위험군이었다.
물론 교제 초기부터 신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 및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연인에게 언어·정서적 폭력을 행사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신체 폭력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피해자 심층 인터뷰를 다룬 논문들을 보면 교제 초기 휴대전화, SNS 상시 확인, 동선 체크, 친구나 가족과의 만남 제한 등의 통제적인 행동이 애정 표현으로 포장되다, 점차 고성과 욕설, 물건 파손, 이후에는 신체 폭행이나 성적 강요로 이어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가스라이팅부터 스토킹, 정서적 폭력, 신체적 폭력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작은 신호부터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아직 교제폭력은 발생한 범죄에 해당하는 형사처벌만이 전부이다. 폭력이 있었다면 폭행죄가, 살인을 저지르면 살인죄가 적용되는 식인 것이다. 피해자가 위협을 느꼈다고 신고하면 연인 간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돼 사건으로 보지도 않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이런데도 아직 여성의 연애가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단 ‘아무나’ 만나보라는 말을 쉽게 하기에 ‘연애’라는 관계 속엔 너무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도 교제폭력의 피해로 인해 수많은 여성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교제폭력 범죄로 인한 피해가 갈수록 심각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범죄가 해결되지 못하는 데에는, 교제폭력에 관한 사회적 인식과 구조적 원인이 크게 작용한다. 교제폭력은 그저 개인의 폭력성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으로 여성 피해자의 성비가 높고, 이들이 가해자 남성에게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젠더 위계 폭력이자 사회에 내재한 여성혐오를 부각하는 사안이다. 그러나 교제폭력은 그저 ‘연인 간 다툼’, ‘사랑싸움’으로 치부되며 그 심각성이 축소되고, 피해자를 법적 보호의 테두리에서 소외시킨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에서 결혼하지 않은 친밀한 파트너로부터의 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여성 10명에 대한 심층 면접을 진행한 결과, 실제로 교제폭력 가해자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적 가치관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가해자들은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도 피해자들의 신체 부위를 동의 없이 노골적으로 만지려고 시도하고 음담패설을 늘어놓거나, 여성혐오적 게임으로 유명한 모바일 게임에 심취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콘텐츠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소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1) 해당 연구 결과는 교제폭력 사안이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전통적 성 관념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이에 따라 교제폭력 문제는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에서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임을 파악할 수 있다.
교제폭력 문제에서 주요한 쟁점이 되는 맥락들이 있다. 바로 친밀성, 동의, 그리고 통제의 맥락이다. 교제폭력의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함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쉽사리 그들을 신고하지 못한다. 가해자들에게서 벗어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친밀한 남성 파트너로부터 상호 간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성적 학대를 당하고,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해를 겪게 된다. 이러한 폭력 피해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통제당하고 상태이기에 가해자의 보복에 대한 공포와 이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과 무력감을 느낀다. 즉 친밀성을 내재한 교제 관계의 폭력에서 쉽게 저항 의사를 밝힐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로 폭력에서 벗어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친밀성, 동의, 통제의 맥락에서 교제폭력은 보편적인 폭행, 상해, 성폭력 문제보다 그 심각성이 오래 지속되고 피해자의 일상 전반을 무너뜨린다. 이에 반해 교제폭력 범죄를 멈추기 위한 법적인 처벌과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 조치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기에, 법적 쟁점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세 가지의 맥락을 더 들여다보며 교제폭력의 원인과 피해 과정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친밀성, 동의, 통제의 맥락을 2024년 화제가 되었던 유튜버 ‘쯔양(본명 박정원)의 교제폭력 폭로 사건을 중점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해당 사례가 세 가지의 맥락이 모두 얽혀있는 경중이 심각한 사안이었고, 많은 사람의 분노를 유발한 영향력 있던 사례이기 때문임을 밝힌다.
- ‘친밀성’의 맥락
최근 교제폭력을 ‘친밀한 관계 내 폭력’로 명명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전통적 유형의 연애 관계 외에 썸, 성적 파트너, 데이트 메이트, 랜선 연애, 데이팅 앱을 통한 만남 등 다양한 형태의 교제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교제폭력은 그 위험성이 상당하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성적 학대, 스토킹, 가스라이팅 등 다양한 양상으로 발생하여 피해자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교제폭력은 바로 이 ‘친밀성’에 의해 폭력의 심각성이 가려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친밀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폭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 있고, 가해자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폭력을 즉각 차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친밀한 사이인 만큼 가해자가 피해자 정보를 많이 알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스토킹이나 협박 등 보복 우려도 있다. 만일 피해자가 폭력 신고를 하더라도 ‘왜 그런 이상한 남자를 사귀었느냐’, ‘왜 맞고만 있느냐’라는 식으로 피해자 탓을 하는 외부 시선이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기도 한다. 친밀한 사이에 이뤄지는 폭력이기에, 이를 피해자의 과민반응 또는 개인 간의 싸움으로 간주하여 피해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주변의 반응이 피해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신고를 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2024년 유튜버 쯔양의 교제폭력 피해 사건도 이 친밀성의 맥락에 의해 피해가 심화한 사례에 해당한다. 쯔양은 B 씨와 교제하며 수년간 폭력, 성폭행, 협박, 강요, 공갈 등의 범죄 피해를 당했다. 게다가 B 씨의 강요로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강요된 성관계로 인해 임신하여 임신 중지 수술을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심각하고 중첩된 여러 폭력을 견디다 못한 쯔양은 B 씨를 고소하기도 했으나, 그가 간곡하게 선처를 부탁하자 합의하고 처벌 불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친밀한 관계 내의 폭력이기에 신고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심각한 폭행 행위도 감내하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선처를 호소하면 피해자는 마음이 약해져 연인 관계였던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가해자로부터 보복당하는 게 두려워 처벌 의사를 거두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피해자의 의사가 없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 불벌죄’가 적용되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2)3) 쯔양 사건의 변호를 맡은 김태연 변호사는 본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 관계가 깊을수록 ‘참아야 한다.’, ‘바로 신고하는 건 네가 지나치다’하는 인식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가 권리를 주장하는 게 더욱 쉽지 않다”고 말했다. 즉, 이러한 ‘친밀함’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이 피해자를 피해에서 벗어날 수도, 벗어날 용기를 낼 수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
- ‘동의’의 맥락
연인 간의 성관계 요구는 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요구로 인식되고 한다. 그러나 연인 관계에서도 상호 간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성관계는 명백한 성폭력이다. 교제 관계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약점과 특성을 공략하여 어떻게든 ‘동의’의 형식을 취하고자 하는 전략을 이용하기 때문에, 교제 관계 내의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성적 동의’는 복잡한 문제고, 뚜렷한 폭행이나 협박의 증거가 없다면 법정에서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동의’는 자유의지에 기반하여 상호 간의 사전적이고 구체적인 대화나 행동을 통해 성립하며, 언제든 한 쪽이 의사 철회를 원한다면 동의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거나, 침묵을 유지했다면 동의한 성관계로 간주된 사례가 터무니없게 많다. 그러므로 ‘동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당연한 생각으로 수사기관과 법원을 찾은 피해자들이 오히려 무고범으로 몰리는 사례도 빈번히 발생한다. 대한민국에선 명시적 거부 의사를 밝혔고 해당 녹음 기록이 있었음에도 조작된 녹취록을 제출한 가해자의 진술만으로 무고 피고인이 되거나, 과도한 음주로 인해 항거불능 상태였고 전 과정이 녹음된 기록을 가해자가 가지고 있다가 편집해 제출했음에도 법정에 서야 했던 피해자,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동의 여부를 밝힐 수 없었던 상태로 연인에게 성폭력을 당했으나 가해자가 무죄를 선고받고 무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피해자 등 이러한 ‘동의’의 맥락으로 성폭력을 넘어 무고한 처벌과 2차 가해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았다.2) 이는 결국 사법기관의 편협한 성 관념을 보여준다. 동의 없는 성관계는 범죄라는 명제에, 피고인이 피해자가 성관계에 암묵적·묵시적 동의를 한 줄 알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피해자의 언행을 심의하고 무죄 판단을 내린다는 건 사법기관의 성차별적인 판결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시스템 속에서 여성은 ‘동의’ 여부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성적 자기 결정권까지 침해당하고 있다. 쯔양도 처음 교제폭력 피해를 폭로하며, 동의 없는 강압적 성관계를 수차례 당했다고 밝혔으나 누리꾼들은 쯔양에게 성폭력 피해를 증명하라고 독촉했다. 결국 명의도용 중절 수술 의혹을 해명하며 쯔양은 성범죄 피해를 당한 녹취록을 공개하였는데, 본 녹취록에선 쯔양이 계속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음에도 동의 없는 강압적인 성관계가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는 이렇게 동의의 여부를, 그리고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렇듯 강압적 성관계의 동의 여부를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고, 이 과정에서 교제폭력 가해자의 책임은 지워지고 피해자가 당한 강간의 선정성, 개인의 태도에 더욱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동의의 맥락 때문에 피해자가 당한 피해가 오히려 더 큰 2차 가해의 원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통제’의 맥락
교제폭력 문제에서 가장 모호하면서도 사안을 심각하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가해자의 ‘통제’이다. 폭력 피해에서 신체적 폭력에 한해서만 사건의 피해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신적 통제 또한 그 피해의 정도가 엄중하다. 친밀한 관계에서 피해자는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배당하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통제’의 맥락에서 교제폭력이 그저 개인의 일탈에 불과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교제폭력에는 신체적 폭력이 발생하기 전 공통된 전조 증상이 있다. 피해자의 사적인 인간관계나 외출, 연락 등을 통제하거나, 더 나아가 피해자의 기본적인 욕구나 선택까지 통제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이러한 가해자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신체적 폭력이 시작된다. 한국여성의전화의 통계에 따르면 싸우다가 홧김에(23.85%), 이혼 요구, 재결합 거부(20.92%), 다른 남성과의 관계 의심(12.77%)이 교제 폭력 가해 동기의 상위 항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신의 통제하에 움직이지 않을 때 분노를 느끼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의 맥락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왜곡된 인식이 깔려있음을 암시한다.3) 앞서 제시한 ‘쯔양’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영향력 있는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용기를 내 신고하기 어려웠던 건, “그 관계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김태연 담당 사건 변호사가 언급했다. 또한 그는 “쯔양의 피해가 너무 컸고 입증 자료도 많았으나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을 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였다”라고 밝혔는데, 실제로 쯔양은 B 씨가 설립한 소속사에 소속되어 40억가량을 갈취당하고, 영향력이 큰 유튜버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B 씨는 쯔양이 헤어지자 할 때마다 “어차피 나 외에 아무도 없다. 너는 내 노예다”라 말하며 폭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가해자에게 모욕을 동반한 강압적인 간섭과 규제, 즉 ‘통제’를 당하게 되면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위축되며, 가해자에 대한 강경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반의사 불벌죄’는 이러한 통제의 맥락을 간과하기에 피해자들이 더더욱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뿐만 아니라 통제의 맥락은 피해자와 주변 인물들이 문제 상황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B 씨도 처음부터 쯔양에게 폭력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소한 통제 행위가 당연해질수록, 피해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당연해지고, 피해자는 통제에 무감해진다. 상대방이 누구와 통화하거나 만나는지 수시로 확인하기, 옷차림 검사하기, 상대방 동선을 파악하고 규제하기, 귀가 시간을 정해놓고 따르기 등 친밀한 관계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통제들은 피해자를 향한 보살핌이나 애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애정과 통제 행위는 다르다. 신체적 학대의 뚜렷한 전조 증상이 바로 심리적 통제이다. 심리적 통제는 아주 사소한 통제부터 시작해 점점 피해자의 일상 전반과 의식을 지배하고, 그들은 무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심리적 통제의 맥락에 익숙해진다면 결국 우리는 교제폭력과 살인으로 인해 더 많은 피해자를 잃게 될 것이다.
교제폭력을 법적으로 처벌하자는 주장은 오랫동안 제기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교제폭력을 별도로 규율하는 특별법이 없다. 2016년부터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처벌 강화를 다룬 법률이 13건이 넘게 발의됐으나, 모두 입법 수순을 밟지 못한 채 기간 만료로 폐기 되고 있다. 그래서 교제폭력은 여전히 일반 형법상의 폭행죄, 상해죄로만 처리되고 있는데, 일반 형법으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강압적 통제’ 행위나, 이별 후에도 지속되는 집요한 스토킹과 보복 위험성,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정서적 의존과 두려움으로 신고를 꺼리는 상황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이뿐만 아니라 연인 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도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가정폭력처벌법의 범위를 교제 관계까지 확대하거나 스토킹 처벌법을 더 강화하자는 의견, 또는 교제폭력 특별법을 입법하자는 의견을 중심으로 교제폭력 처벌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 처벌법은 법안의 목적 자체가 ‘가정의 평화와 안정 회복’이기 때문에, 가해자 처벌이 실질적으로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스토킹 처벌법 또한 친밀한 관계 내의 성폭력이나 강압적 통제를 명확히 규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교제폭력 특별법도 앞서 언급했듯 썸, 성적 파트너, 데이트 메이트, 랜선 연애, 데이팅 앱을 통한 만남 등 여러 친밀한 관계의 유형이 존재하기에, ‘교제폭력’으로만 규명하기에는 여러 관계의 피해자가 사각지대에 놓일 우려가 있다. 따라서 친밀성, 동의, 통제의 맥락에서 이뤄지는 교제 관계 내 폭력을 다음 세 가지 차원의 법안이 입법될 필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 ‘친밀한 관계 내 폭력’ 처벌 법안 입법
교제 관계에는 수많은 유형이 있기에, 이를 법안에서 모두 명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교제 폭력 범죄에는 교제 당시가 아니라 이별을 통보한 뒤 발생하는 유형도 많으므로 ‘교제폭력 특별법’은 이러한 유형의 폭력을 배제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일부 여성 단체들은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법안을 입법할 것을 피력한다. 미국의 경우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낭만적이거나 친밀한 사회적 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으로부터의 폭력으로 정의하여 입법례를 진행하였다. 친밀한 관계의 존재 여부는 (1) 관계의 기간, (2) 관계의 유형, (3) 관계에 연관된 사람 간의 상호작용 빈도를 고려하여 결정한다. 친밀성을 기반으로 관계의 유형을 정의하는 것은 명확한 법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영미법은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 더 우선이라고 보며 좀 더 포괄적인 어휘로 법안을 규정하였다. 대한민국 법안에서도 이러한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입법할 필요가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사랑싸움이라 치부되며 그 경중을 과소평가 당한다. 따라서 현장에 출두한 경찰도 본 사안을 심각하게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다분하며, 연인끼리 화해하라는 식으로 가해자를 풀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친밀한 관계’라는 특수성을 가진 가해자에게 신상과 보복 가능성을 그대로 노출당한 채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수많은 사적 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되어 있기에, 교제 폭력의 피해자는 대부분 보복과 추가적인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친밀한 관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이 아닌 가중 처벌로 대응해야만 한다. 미국의 루이지애나주, 캘리포니아주는 이러한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가중해 처벌하는 주법을 적용하고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선 교제폭력 관련 법안이 부재하기 때문에, 현행법이 ‘사전 예방’이 아닌 ‘사후 처벌’의 역할로만 기능한다는 점이 교제폭력 피해에 가장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거나 살해를 당해야만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제폭력 이는 곧 피해자에겐 곧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의 부재를 뜻한다. 따라서 피해자의 보호에 우선순위를 두고, 규제를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넓히는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입법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해당 법안에는 기간 제한 없는 접근금지 명령 또한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현재 접근금지 명령은 스토킹 처벌법에만 포함되어 있으나, 교제 관계에서는 수많은 집 주소, 핸드폰 번호, 비밀번호 등 수많은 개인 정보들이 공유되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금지 명령이 법안 입법 시 반드시 추가될 필요가 있다.
- 비동의 강간죄 도입
연인 간에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 또한 엄중히 처벌되어야 한다.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안은 바로 ‘비동의 강간죄’이다. 비동의 강간죄는 연인 관계를 포함하며 모든 성관계 시 한쪽 상대가 이를 동의하지 않을 경우 강간으로 성립하는 법안이다. 성폭력은 불평등하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성별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발생한다. 1994년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한국의 법 시스템에서 여전히 강간죄의 구성 요건은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으로 해석된다. 수사 재판 기관은 이를 빌미로 '왜 저항할 수 없었는지', '왜 벗어나지 못했는지' 피해자에게 질문하며 협박·폭행 유무의 입증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 따라서 피해자는 합의되지 않은 강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심한 폭행이나 제압의 정황이 없었다면 성폭행 피해를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러한 강간죄의 편협한 성립 요건은 피해자를 추가적인 성폭행 피해와 보복의 위험에 노출되게 할 뿐만 아니라, 각종 성희롱, 무고죄 고소 등 2차 가해를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비동의 강간죄’는 1983년 캐나다가 형법을 전면 개정해서 최초로 도입한 이후, 독일·영국·스웨덴·덴마크·스페인·오스트레일리아 등도 강간죄 구성 요건에 ‘동의 여부’를 명시하며 확산되었다. 미국 역시 대다수 주에서 ‘동의의 부재’를 강간의 판단 기준 중 하나로 두고 있다. 영국에서는 강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저항 여부가 아니라,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가 있다고 ‘합리적으로 믿을 근거가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심사한다. 술에 취해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 공포로 인해 몸이 굳는 동결 반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동적 순응은 모두 동의로 인정되지 않는다. 상대가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동의가 성립하지 않으며, 동의는 추정의 대상이 아니라 확인의 대상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스웨덴은 한발 더 나아가 2018년 명시적 동의법을 도입하며, 강간의 기준을 ‘적극적으로 표현된 동의의 존재 여부’로 명확히 전환했다. 이 법에 따르면 침묵, 소극적 반응, 관계의 지속, 이전의 성적 접촉 경험은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을 통해 자발적이고 분명한 동의가 확인되지 않았다면 범죄가 성립할 수 있고, 이는 스웨덴이 성적 자기 결정권은 추정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도화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해외는 ‘동의’의 중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게 아닌, 가해자가 스스로 무고를 증명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 피해자를 각종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2021년 유엔인권이사회는 강간에 대한 특별 보고서를 채택하며 모든 국가에 비동의 강간죄 입법을 권고한 바 있다. 이처럼 강간죄 성립 여부에서 ‘동의’를 중시하기 시작한 국제적 흐름과 달리, 지난 2025년 12월 국민통합위원회는 개최한 행사에서 ‘비동의 강간죄’가 남성 역차별을 조장하는 성평등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몇 개월 전 프랑스에서 상원의 압도적인 찬성 비율로 비동의 강간죄 개정안이 통과한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대한민국의 여전한 여성혐오와 후진적인 성 관념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범죄 처벌에는 ‘가해자 역차별’이 아닌 ‘피해자 보호’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비동의 강간죄가 국제적인 입법 과제로 주목받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또한 ‘비동의 강간죄’ 입법이 시급하다.
- ‘강압적 통제’에 대한 처벌
피해자를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일 또한 법의 개입을 통해 규제해야 한다. ‘강압적 통제 행위(coercive control)’는 2007년 에번 스타크 럿거스 대학 교수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상대방의 일상에 대한 간섭과 규제, 모욕 주고 비난하기, 행동의 자유를 빼앗고 가족 및 지인 등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등의 가해 행위” 전반을 의미한다.4) 앞서 통제의 맥락에서 언급했듯이, 강압적인 심리적 통제는 신체적 폭행의 대표적인 전조 증상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2024년 소병훈 의원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상대를 소유물, 통제와 조종 대상으로 보는 가해자 특성은 피해자가 살해(자살 포함)당할 수 있음을 예견하는 매우 뚜렷한 위험 요인”이라 지적한 바 있다. 결국 ‘강압적 통제’에 대한 처벌은 정신적 통제를 처벌함으로써 추가적인 교제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법안이기에 더더욱 명문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일부는 이러한 ‘강압적 통제’의 처벌에 대해 사적 관계에 대한 법의 지나친 개입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현행법이 교제폭력을 부분적으로나마 ‘사후 처벌’하는 식으로만 집행된다는 점에서, ‘사전 예방’을 가능케 하는 ‘강압적 통제’ 처벌법은 피해자를 하루빨리 구조할 수 있는 중요한 법안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강압적 통제 행위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15년에 「중범죄법(Serious Crime Act)」5)을 개정하여 제76조에 ‘친밀한 또는 가족 관계 내 통제적이거나 강압적인 행동’으로서, 친밀한 관계 또는 가족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사람 간에 통제적인 행동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행하는 경우 처벌 받을 수 있음을 명시해 두었다. 미국 또한 최근 심리적 학대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자살)에 이르게 되는 경우, 이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는 판례를 인정한 바 있다. 호주는 주(州) 단위로 강압적 통제를 범죄화하는 입법을 확대하고 있는데, 일부 주에서는 반복적 감시, 고립, 위협, 일상 통제를 가정폭력·친밀관계 폭력의 핵심 요소로 명시하고, 물리적 폭력이 발생하지 않아도 접근 금지나 형사 처벌이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강압적 통제’ 처벌의 핵심은 피해가 발생한 ‘결과’가 아니라, 위험을 만들어내는 관계의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심리적 폭력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해 왔다. 반복적 모욕, 통제, 위협, 고립이 피해자의 정신적 건강과 자유를 침해했다면 범죄가 성립할 수 있으며, 이는 강압적 통제 개념과 실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해당 법안은 프랑스 사법부가 연애·결혼 관계라는 사적 성격을 이유로 책임을 경감하지 않으며, 오히려 친밀성이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이미 신체적 폭행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심리적 폭력을 짚어 더 큰 피해로 번지는 걸 막고자 노력하고 있다.
교제폭력 처벌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바로 ‘반의사 불벌죄’다. 이는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법적으로 벌할 수 없게 하는 제도로, 이미 가해자에게 심리적 통제를 받고 있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처벌 의사를 밝히기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는 법 조항이다. 따라서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 지인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협박하며 이 반의사 불벌죄를 이용하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린 피해자는 많이 취약해져 있기에, 이러한 심리적 통제하에 수반되는 교제폭력은 법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멈춰야만 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오히려 가해자에게 면죄의 수단이, 피해자에겐 폭력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억압의 장치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 입법부와 사법부는 ‘강압적 통제’를 법적으로 처벌하여 피해자를 심리적 피해에서 벗어나게 하고, 반의사 불벌죄 또한 폐지하여 폭력을 행한 가해자가 확실히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가 더 큰 신체적 폭력이나 피해를 당하는 걸 막고, 더 나아가 또 다른 피해자가 희생당하는 걸 막을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연애는 각종 로맨스 드라마, 영화 등의 미디어에서 다뤄지며 하나의 낭만적인 신화가 되었다. 사람들은 언젠가 나에게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와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꾸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의 연애는 그저 행복과 안정을 추구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가 아니다. 친밀한 연인이 행하는 폭력은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고, 피해자의 일상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제폭력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으나, 이를 처벌한 특별법은 여전히 부재하며 정부의 대응 또한 미온적이다. 이제 교제폭력을 ‘연인 간 싸움’이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안일한 인식은 소멸해야 한다. 교제폭력 문제는 피해자의 안전과 생존을,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적 존엄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경고다. 국가는 더 이상 피해자들의 살고자 하는 외침을 묵인해선 안 되며,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제도적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국교지에서 20-30세대를 대상으로 연애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45명 중 95.6%가 앞으로 연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연애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는 ‘연애하면서 받는 감정적 안정, 즐거움이 단점보다 크기 때문에’, ‘정서적 관계가 일상생활 하는 데 큰 의지가 돼서’였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 연애를 통해 정서적인 지지와 안정을 얻으려면 연애 관계 자체에서의 ‘안전’과 ‘평등’을 보장받는 게 필수적이다. 이재명 정부가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범죄, 권력형 성범죄, 디지털 성범죄를 5대 폭력으로 선정하고, 위 범죄에 따른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를 120대 국정과제로 발표한 만큼, 이제는 단순한 선언과 약속이 아닌 실질적인 변화와 법안 입법이 진행돼야 한다. 교제폭력은 피해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고, 수많은 여성을 희생시킨 참사다. 국가는 더 이상 여성의 죽음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으로 인한 피해 소식이 각종 언론 매체와 소셜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정부는 이 비극적 참사에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하며, 조속한 법안 입법과 엄중한 처벌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때다.
나아가 시민 사회의 연대 또한 절실하다. 교제폭력과 살인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닌, 당장 우리의 곁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는 누구나 삶을 꾸려가는데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친밀성은 동등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모든 사람이 피해의 두려움 없이 보다 안전하게 애정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우리 모두 평등하고 안전한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우리 모두 교제폭력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마주하고, 피해자와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2차 가해를 일삼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폭력의 책임은 오로지 가해자에게 있으며, 피해자의 행동이나 태도가 폭력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피해자의 과거 행동을 문제 삼아 가해의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무책임한 비난을 던지는 행위는 가해의 공범이 되는 행위일 뿐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단 한 명의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잃을 수 없다. 교제폭력이라는 재난을 멈추기 위해선 교제폭력을 둘러싼 사회적인 보호 장치 마련과 인식 개선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이 교제폭력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 안전한 일상을 찾길 바라며, 교제폭력 피해를 막기 위해 마련된 말없는 112 신고 캠페인 ‘똑똑’ 제도에 관한 설명과 교제폭력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를 첨부한다.
경찰청은 교제폭력 피해에 대비해 '말없는 112신고' 일명 '똑똑'을 2022년 1월부터 시행 중이다. 말 없는 112신고 '똑똑'은 수신자가 112에 전화를 건 후 침묵이 지속될 경우, 경찰관이 "지금 말할 수 없는 상황이면 동일한 숫자 버튼을 2회 눌러 주세요"라고 요청한 뒤 수신자가 안내에 따라 숫자 버튼을 누르면 신고자 휴대전화로 '보이는 112' URL 주소를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이때 개인정보 및 위치정보 등에 동의하면 경찰 쪽에서 신고자의 위치 확인이 가능하며 실시간 영상통화, 비밀 채팅 등 현장 상황 등을 경찰관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있다. 이후 위치정보와 현장 상황이 파악되면 경찰이 출동하여 추가적인 범죄 피해를 막고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다.
위 표는 성평등가족부(구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교제폭력 피해 진단 체크리스트로,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정서적 폭력, 강압적 통제 등 여러 유형에 대한 피해를 자가 진단할 수 있다. 만일 스토킹 피해가 의심된다면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홈페이지에서 추가로 [스토킹 피해 진단 체크리스트]도 해볼 수 있다. 다만 자가 진단 결과는 참고 사항이기에, 전문적인 상담과 도움을 원한다면 성평등가족부에서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 1366을 통해 상담받기를 권유한다. 부디 당신의 일상이 안전하길, 혹은 조속히 안전해지길 바란다.
각주
1) ‘데이트폭력'이라는 표현은 공권력이 개입해 처벌해야 할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해 연인 사이에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로 가볍게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교제 폭력’으로 명명한다. 최근 대검찰청 등에서도 데이트폭력 대신 교제 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다만 쯔양 사건의 경우 쯔양이 직접 ‘고소’를 하였기 때문에,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지 않은 채 계속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3) 이러한 ‘반의사 불벌죄’는 친밀성의 맥락뿐만 아니라 뒤에 후술할 통제의 맥락과도 얽혀 심리적으로 위축된 피해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관련 내용은 ‘통제’ 맥락에서 추가로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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