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유감: 객관과 중립 너머의 저널리즘

유라

by 동국교지

들어가며


“언론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며, 시민의 신뢰는 언론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시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이 필요하다. 언론은 인권을 옹호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추구한다.”
-한국기자협회 윤리헌장 서문

신문,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과 통신 매체 및 방송을 통틀어 지칭하는 ‘언론’은 시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여론 형성에 관한 공적 기능을 수행한다. 언론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공공복리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1)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대중적 영향력이 매우 큰 기관 중 하나이다. 이전에는 길거리의 신문, TV에 나오는 뉴스를 통해 언론을 접할 수 있었다면, 최근에는 휴대폰에서 인터넷, SNS 등 각종 포털에 접속해 기사를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언론은 우리의 일상 전반에 필수적인 정보 전달 매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현재 언론과 언론인은 ‘기레기’, ‘황색 언론’ 등의 멸칭을 얻으며 일부 시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 윤리 헌장 서문에도 나와 있듯 언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시민의 신뢰이고 언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시민인데, 언론은 왜 시민의 불신과 멸시를 받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언론이 ‘중립성’을 강조하며 사실 나열식의 보도를 하거나, 특정 정파성을 띠고 있다거나, 빠른 보도를 위해 정확한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등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더불어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사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세분화되면서, 언론의 기사가 아닌 SNS에 업로드되는 게시물, 쇼트폼이나 대화형 AI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늘어나면서 결국 현대의 기성 언론이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언론’이 필요하다.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공유되는 정보는 너무 광범위하고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게다가 생성형 AI의 이용이 만연해지면서 AI가 거짓된 정보를 생성하여 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정보가 곧 자산이고 권력인 현대 사회에선 전문적인 게이트키핑(Gatekeeping)1)2)을 거치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주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언론의 미래를 바라보기에 앞서, 언론의 역사와 설립 목적부터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언론의 역사 톺아보기

인류의 역사에서 정보는 늘 권력과 궤를 같이했다. 인쇄물이 발간되기 전 고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입소문이 곧 뉴스였고, 개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원천이자 전달의 주체였다. 다만 개인 사이에 구전으로 떠도는 정보는 신뢰도가 낮았기에, 사람들은 마을 회의소 같은 공개 장소에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고, 이는 언론 출현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마을 집회소에서 의논할 때는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퍼지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들 상당수가 글자를 배우지 못했으므로 구두 대화로만 정보를 전달하고 습득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고위 대신들이 좀 더 발전된 형태인 특별 회의 장소에서 나랏일을 토의하기 시작했고, 정보의 공유 및 토의가 교육받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정보’는 권력 주체들이 먼저 독점하고, 민중에게 하달하는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고려시대부턴 정치·경제·인사 등을 논책하는 언론 장치인 대간제도(臺諫制度)가 확립되기도 했으나, 고위직 중심의 폐쇄적 제도였기에 민중과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등장한 신문고 제도는 민중 개인의 의사를 임금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초의 상향식 언론 매체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전달하는 권한이 지배층에 있어 여전히 정보 전달과 공유의 불평등이 지속됐다. 조선 후기엔 최초의 근대적 민간 언론인 《독립신문》이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에 의해 창간됐는데, 서재필은 창간사에서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 민중의 무지함을 꼽으며 민중을 가르치려는 계몽적 의도로 신문을 창간하였다고 밝혔다. 즉, 언론 기관의 탄생 배경 자체가 시민의 자발적 결사체라기보다, 정보를 가진 엘리트 집단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고자 만든 ‘지도자적 매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 독재 정권이 등장하며 언론은 더 기득권화되었다. 이 시기의 언론은 정부가 매일 아침 전달한 ‘보도지침’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고 그들에게 검열당해야 했다. 권력에 저항하던 기자와 언론사들도 있었으나, 언론인들은 700여 명가량이 해직당하고 몇몇 언론사는 강제 폐간되었다. 결국 언론은 살아남기 위해 권력과 정권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일부 언론은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그들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나 이때부턴 자본과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며 ‘기업’이라는 경제 권력과 공생 관계가 된다. 즉, 언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권력이나 자본과 유착하고, 고학력 엘리트끼리 정보를 공유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그들만의 리그’이자 ‘카르텔’이었던 것이다. 과거에서든 현대에서든 정보는 곧 권력이고, 정보를 공유하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이슈를 설정하는 행위는 곧 권력 행위 그 자체다. 그렇기에 언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역사적으로 기득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매체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언론은?

과거에 고위 대신들이 언론 기관의 역할을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오늘날 언론의 구성원들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소위 ‘엘리트’가 대부분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3년 발표한 전국 언론인 조사에 의하면 4년제 대졸자는 72%, 석사학위 소지자는 23.4%, 박사학위 소지자는 3.2%였다. 특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같은 대형 언론사의 기자들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들이 많다. 이런 경향이 줄어들고 있다곤 하나, 여전히 언론이 언론인에게 요구하는 소양은 ‘높은 학력과 스펙’이다. 그리고 4년제 명문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선 중산층 이상의 안정적인 가정 배경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비슷한 교육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사회, 경제적 배경을 공유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뉴스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의 시각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언론의 엘리트 중심적 구성이 정치적 성격으로 이어진다는 역사가 오늘날에도 투영되는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다른 부분은, 이러한 엘리트적 배경이 언론인의 기득권적 태도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언론인은 자유롭게 원하는 내용을 보도하며,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권력을 비판한다. 혹자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걸 강하게 비판하지만, 이러한 시선이야말로 언론 기관의 설립 배경과 목적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현대 언론은 ‘삼권분립에 이은 제4 권력’이라고 불릴 만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견제하고, 사회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다.3) 언론은 통치 주체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감시견(Watchdog)’의 역할을 수행하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언론이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은 필연적이다.

언론의 정파성 또한 마냥 부정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언론의 추구 가치 중 하나인 민주주의가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여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론이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견제하듯, 언론에도 서로를 견제할 또 다른 언론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진보 언론을 대표하는 한·경·오(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러한 언론의 정파성과 상호 간 견제가 보도 품질의 향상에 기여한다면, 언론이 서로의 공익성을 견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바이든-날리면’ 논쟁 때부터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 논조를 유지하고, 12.3 내란 이후 적극적으로 정치권력을 비판한 MBC가 탄핵 방송 및 선거 방송에서 압도적인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방송사의 시청률은 단순 지표가 아니라, 시민의 신뢰와 지지를 확인하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의 언론은 여전히 정치성을 내포하지만, 기득권적 성격을 극복하고 정치권력을 비판하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객관적 언론이라는 환상

언론과 저널리즘에 관한 논의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은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언론이 가치 판단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여 객관적인 자료 수집과 기사 보도에 치중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인 언론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기사를 작성할 때, 어떤 사실을 보도할지, 어떤 표현과 헤드라인을 쓸지 선택하는 일에는 모두 기자의 가치 판단이 수반한다. 또한 기자가 쓴 기사를 데스크4)가 게이트키핑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도 데스크의 가치 판단이 이루어진다. 기자의 소재 선택, 기사 작성, 데스크의 검토까지 언론이 기사를 내보내는 과정에서 진실은 수없이 여과되고 수정된다. 그렇기에 객관적이고 완전한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은 기대하기 어렵다. 간혹 언론의 자극적인 단어 사용과 보도 행태가 많은 비판을 받는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상당히 상업화됐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극적인 기사와 제목에 끌릴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극적인 보도 양상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영 언론은 결국 기업이고, 기업은 이윤 창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사 클릭 수와 포털 사이트 체류 시간을 계산하여 경쟁력을 얻고, 그 경쟁력을 바탕으로 기업으로부터 광고를 받아 그 자본으로 유지되는 게 언론이다. 이렇게 상업화된 언론은 광고주인 기업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자본이 없으면 언론도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현재도 언론이 정치, 경제 권력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언론이란 더 성립하기 어렵다.

특히 언론과 권력의 연결고리를 한층 더 강화하는 장치는 ‘출입기자단’과 ‘엠바고(Embargo)’ 제도이다. 출입기자단의 기자들은 각종 행정 기관의 기자실에 정기적으로 출근하고, 기관에서 정보를 제공하거나 보도를 요청하면 기사를 작성하는 식으로 근무한다. 이러한 출입기자단 제도는 행정 기관과 언론이 밀착됨을 넘어 공조하는 관계를 형성하게끔 한다. 또한 출입기자단에 속하지 않은 언론사는 해당 기관의 정보를 얻기 어렵기에, 언론은 기관 친화적 태도를 유지하며 이들을 위한 홍보성 보도를 할 수밖에 없다. 엠바고 제도는 기관 측에서 언론의 보도 유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사회적 혼란과 기밀 유출을 방지하거나 보도의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도입된 관행이다. 그러나 엠바고는 정부가 언론의 보도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언론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언론이 엠바고를 깨고 이르게 기사를 내면, 그 뒤부터 기관 측에서 해당 언론사의 출입과 취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론에도 여러 이해관계와 압박이 존재하기에 언론은 객관적이기만 한 자세를 취할 수 없을뿐더러, 언론 공동체는 인간에 의해 구성되기에 완전히 가치 배제적인 집단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언론에 ‘객관’을 강요하는 것은 언론을 둘러싼 여러 맥락을 무시하고 편협하게 바라보는 시각에 불과하다.


언론의 중립이라는 환상

언론에게 객관성과 더불어 강요되는 가치는 ‘중립’이다. 중립을 고수하기 위해 언론은 양쪽 다 비판하는 ‘양비론’의 논리를 취하거나, 양쪽의 주장을 인용하여 전달만 하는 기사를 보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중립의 태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에 관한 언론 보도와 이를 둘러싼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은 법 위반보다 정치적 반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했고, 국민 사이에서도 탄핵에 대해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언론은 편파성 논란을 피하고자 찬반양론 측의 의견을 모두 제시하는 중립적인 보도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중립적 보도는 사실상 정당하지 않은 탄핵 소추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야기했다. 양측의 의견을 동등하게 전달만 하거나, 동등하게 비판하는 중립적 보도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주장에도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기계적 중립을 지킨 언론의 보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언론의 중립적 태도는 기득권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사건을 둘러싼 논쟁에서 기업, 정부와 같은 기득권에 발언의 기회가 더욱 많이 주어진다. 기업이나 정부는 기관 사이트 포털, 기관 공식 SNS, 기자회견 등을 열어 본인들의 입장을 발표하고, 기관 ‘공식’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 시민, 사회적 약자의 경우 SNS 같은 개인 소셜 미디어로만 의견을 낼 수 있고, 개인 계정에서 작성한 글이기에 사람들은 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이 사이에서 시민과 사회적 약자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대변하는 보도를 하여, 기득권과 시민의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완화하는 것이 언론이 진정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기계적으로 ‘중립’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태도가 권력을 견제하고 시민을 위하는 언론이 지녀야 할 태도라는 의미다. 이에 반해 언론의 중립은 어느 쪽의 입장도 강경하게 지지하지 않으면서 본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언론이 선택할 수 있는 비겁한 도피처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했듯 언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권력을 견제하는 ‘감시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사회를 주시하며, 모두에게 합당한 비판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일부 언론은 그저 주요 인사들의 의견을 받아쓰기하는 속기사와 같다. 의견을 그대로 인용하는 “따옴표 저널리즘”이 어떻게 중립이고 객관일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확증 편향이 있기에, 언론인은 그 편향을 인지하고 분석과 판단의 과정을 거쳐 가장 공정한 정보를 전달할 의무가 있다. 반면 어떠한 가치 판단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편향된 발언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는 편향을 복제할 뿐이다. 중립적 언론이라는 환상이 성립 불가능한 결정적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가운데에 선다는 것은, 시소 중간에 물건을 놓아두면 더 무거운 쪽으로 쏠리듯이, 더 힘 있는 기득권층에게 기울어져 이를 묵인하겠다는 정치적 전략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언론은 어떤 가치 위에 서서 진실을 규명할 것인지 확실히 정해야만 한다.


언론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

기성 언론의 신문 부수 판매량과 방송사 시청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살아남기 위해선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시민의 관심과 신뢰를 잃은 언론은 결국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언론은 어떤 의제를 설정할 것인지,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할 것인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만 한다. AI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공지능도 사실 나열 형태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게 가능해졌으므로, 사실을 나열하고 받아적는 언론은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과 언론인이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은 가치 판단의 영역에 해당하는 ‘의제 설정’ 능력이다. AI는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하는 만큼 주체적인 가치 판단이 어렵기에, AI 사용이 확산할수록 잘못된 정보가 시민의 일상에 침투할 가능성이 높아질 전망이다. 이에 대응하여 언론은 명확한 기준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질 만한 의제를 선정하고, 시민에게 신뢰할 만한 보도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언론이 일방적 정보 전달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면, 현재는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정보 제공자와 수용자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이 언론계의 가장 큰 변화이자 위기다. 시민들이 이제 그저 정보를 전달받는 수용자가 아닌,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이용자이자 언론을 견제하는 또 다른 감시자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제 기성 언론은 기술과 단순 이용자가 대체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언론은 단순 사실 보도를 넘어 사건의 맥락을 짚어내고,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주제적 프레이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언론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는 ‘일화적 프레임’을 주로 사용해 왔다. 예를 들어 교제 폭력과 같은 구조적 젠더 폭력 문제를 단순한 연인 간 다툼으로 다루거나, 청년 실업 문제를 청년 개인의 불성실 문제로 치부하는 식의 보도가 이에 해당한다. 결국 언론의 일화적 프레이밍은 시민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사건의 사회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악영향을 초래했으며 언론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무너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으로의 언론은 정부나 사회에 구조적 책임을 묻는 프레이밍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실을 규명하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저널리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획기적인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

언론의 개혁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정파성’일 가능성이 크다. 앞선 MBC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정치권력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언론의 행보는 곧 시민의 신뢰 상승으로 이어졌다. 해외 언론의 경우에도 프랑스의《르 몽드》와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가 민주당 성향의 정파성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분석을 통해 보도의 품질을 높이려 노력하기에 지속적으로 시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 정치적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언론은 정파성을 띠어도 괜찮다. 이러한 정파성이 보도의 품질을 낮추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언론이 선택하는 가치는 권력도, 자본도 아닌 시민의 권익과 민주주의라면, 이는 언론이 마땅히 지향할만한 변혁적 가치라 볼 수 있다.


나가며


“비판의 자유가 없으면 진정한 칭찬도 없다” - 르 피가로, 프랑스
“의견은 자유롭게, 사실은 신성하게” -가디언, 영국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 - 워싱턴포스트, 미국


말씀 언(言), 논할 논(言). 언론이란 단어는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기관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론은 인간이 자기 생각을 펼치고 사회적 가치를 논쟁하는, 능동적인 행위 그 자체다. 뉴미디어 시대의 시민들은 더 이상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아닌, 또 다른 ‘언론의 주체’가 되었다. 기성 언론이 이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객관과 중립이라는 낡은 권위 뒤에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신뢰 회복을 위한 개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또한 언론이 지녀야 할 태도는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언론은 대통령 탄핵 정국같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선 더 자유롭게 권력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뉴스 시장을 연구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도 언론에 대해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시스템’이라고 말한 것처럼, 언론과 뉴스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언론 기관은 품위, 권위를 지키는 데 치중하며 언론 본연의 가치를 잊지 말고, 스스로 시민을 위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객관과 중립을 고수하는 태도 역시 지양할 필요가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반면 취약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겐 너무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의제 설정의 의무를 지닌 언론은 이들 사이에서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힘을 실어주는 확성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일제 강점, 분단, 그리고 군부 정권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타국의 언론보다 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부족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언론을 둘러싸고 여러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 속에서 언론이 객관과 중립을 고수하는 태도는 그저 편리한 방관을 선택할 뿐이란 걸, 정보의 능동적 이용자가 된 시민들은 알고 있다. 《르 피가로》, 《가디언》, 《워싱턴포스트》의 언론사 모토를 살펴보면, 언론사마다 다채로운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모두 ‘정직’만을 내세우며 여전히 표리부동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안일한 태도는 워치독이라는 언론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언론은 항상 눈을 부릅뜬 채로 권력을 견제하고, 시민에겐 더욱 평등한 정보와 공론장을 제공해야 한다.

이제 언론이 누구를 더 비판적으로 견제해야 하고 누구의 목소리를 더 듣고 조명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기존의 기득권과 반노동·친자본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언론은 예정된 붕괴의 길을 걸을 것이다. 저널리즘의 신뢰를 추락시킨 건 언론이지만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 또한 언론이다. 언론이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하고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할 때, 비로소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저널리즘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고, 그 신뢰의 회복만이 언론의 유일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각주

1) 기자나 편집자와 같은 뉴스 결정권자가 보도할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일.

2) 본 글에서는 각종 외국어 및 외래어가 자주 사용될 것임을 미리 알린다. 동국교지는 바른 한글 사용을 지향하고 있으나, 업계 특성상 외국어·외래어가 업무 용어로 많이 쓰이기에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기 위하여 단어의 한글 변환을 최소화하였다.

3) 18세기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의회 내 기자석을 가리켜 “제4계급(Fourth Estate)”이라 칭한 데서 기원했다.

4) 기자들이 취재해 온 기사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보도 여부를 결정하는 언론의 주축. 보통 더 이상 현장을 뛰지 않는 연륜 있는 기자들이 데스크에서 일한다.


참고문헌

1) ⌜언론기본법⌟ (법률 제3786호, 시행 1984. 12. 31.), 『국가법령정보센터』

(1) 김민환, ⌜한국 저널리즘사⌟, 『나남출판』, 1991.

(2) 김성재, ⌜"이 정도는 방송장악 아니다"라는 중앙일보의 궤변⌟, 『세상을 바꾸는 시민 언론 민들레』, 2024.07.05.,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54

(3) 김혜영·조소진, ⌜민주당의 '언론 유감'… "언론 잘못이 먼저" vs "해묵은 피해의식"⌟, 『한국일보』, 2020.08.01.,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0073117000002587

(4) 바비 젤리저, 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 크리스 W. 앤더슨, ⌜저널리즘 선언⌟, 『오월의 봄』, 2023.

(5) 박건호, ⌜삼권 분립, 대간 그리고 언론⌟, 『레디앙』, 2023.06.03.,

https://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71301

(6) 박영흠, ⌜한국 언론 정파성의 기원과 형성 : 신문의 적대적 정파성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32(2), 2024.

(7) 안수찬 외 14인, ⌜저널리즘의 지형 - 한국 기자와 뉴스⌟, 『이채』, 2016.

(8) 양상우, ⌜언론본색 - 가려진 진실, 드러난 욕망⌟, 『인물과사상사』, 2025.

(9) 유시민, ⌜‘언론의 중립’이라는 망상⌟, 『세상을 바꾸는 시민 언론 민들레』, 2024.08.05.,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212

(10) 이건혁, ⌜“법과 원칙 무너진 사회… 언론이 사명 다할 때”⌟, 『스카이데일리』, 2022.12.16.,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6506

(11) 이영광, ⌜“객관주의·따옴표 내세워 탄핵 집회 '양비론 보도' 언론들...시대정신 반영 못하고 무책임, 혼란 가중시켜"⌟,『전북의소리』 2025.02.26.,

http://www.jb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15229

(12) 이용규, ⌜[강준만의 '易地思之'] '재래식 언론'이라는 욕설⌟, 『무등일보』, 2026.01.19.,

http://www.mdilbo.com/detail/2q2hIk/752277

(13) 이희용, ⌜‘계엄도 탄핵도 잘못’ 양비론 언론, 시민 단죄 못 피한다⌟, 『한겨레』, 2024.12.26.,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174770.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60129

(14) 정준희, ⌜윤석열과 망상 세력 앞, 언론의 두 가지 선택지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시사IN』, 2025.01.20.,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829

(15) 정진석, ⌜한국언론사연구⌟, 『일조각』, 1983.

(16) 정철운, ⌜계엄 탄핵의 순간, 시청자 ‘단전·단수’ MBC와 JTBC 택했다⌟, 『미디어오늘』, 2025.12.06.,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0615

(17) 조하준, ⌜[조하준의 직설] 기계적 중립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것이다⌟, 『굿모닝충청』, 2025.04.02.,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346

(18) 한국학중앙연구원, ⌜언론(言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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