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서은
‘강아지를 싫어하던 아버지는 강아지를 집에 들인 이후, 우리 집에서 강아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흔히 떠도는 웃기고 다정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변한 것은 누구의 덕일까요? 억지로라도 강아지를 데려온 화자일까요, 아니면 유난히 사랑스러웠던 강아지일까요? 무엇도 아니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변하신 걸까요?
유난히도 어려운 몇 가지 만남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에, 때로는 불쾌함에, 마주 앉은 이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수박의 겉을 핥는 만남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씩,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시간들이 생겨납니다. 그때 비루한 관념은 사라지고 눈앞의 실체가 떠오릅니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고도 지난합니다. 관념 속의 타자가 나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삶을 구성하는 것은 관념이 아닌 실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강아지를 만나고 이런 순간들을 지나오셨겠죠.
우리는 모르는 대상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결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삶은 직접 만나보지 못한 대상의 인상을 부득불 건네줍니다. 그것이 언제나 옳기만 하면 좋으련만, 그르고 비뚤어질 때도 물론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인상은 모르는 대상을 미워하고 비웃게 하며, 대상으로의 다가감을 저지하곤 합니다. 저는 이런 것이 편견이나, 어떨 때는 혐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혐오가 이리 부드러운 언어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은, 만남의 기회를 앗아 실체 없는 관념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은 분명 혐오의 성질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84집은 만남을 담았습니다. 배식대 너머의 노동자와 만나고, 작품 너머의 예술인을 만납니다. 왜곡과 회피를 넘어 팔정도에서 만난 이들과 새로이 세월을 기억합니다. 환자와 여성의 죽음 이전에 눈을 마주쳐주지 않은 사회의 혐오에 대해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저지한 언론과 문화 예술의 공론과 만남들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고발합니다. 그리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관념을 버리지 않는 산업의 미래를 예견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만남을 유지하지 않는 성장을 그렸습니다.
저희가 담은 만남이 관념에 가려진 실체를 바라볼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미약하게나마 글 속의 대상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 여러분이 직접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東國 동국교지 편집장 김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