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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Jan 06. 2021

니체 평전

'니체' 홀링데일, '니체의 삶' 프리도 지음

니체는 신 없이 사는 세상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물론 근대철학 사유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나와야할 사유 세상이었다. 그의 저작은 에로스, 황홀경, 과잉이라는 한 시대의 생활 방식을 낳게 했으며 믿음은 유익해서이지 더는 득이 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독설을 정당화시켰다. 더 나아가 고정된 인간 본질은 없으며 모든 자아는 상호 비일관성이고 더욱이 조화될 필요조차 없다는 반본질주의의 원인 제공자였다. 철학적으로는 불변 실재를 포기하는 것이고 인간 사회적으로는 종교적 무리 짓기를 그만두면 인류가 도덕적으로 진보를 이룬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단초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그의 영향으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자연에 은둔하는 그룹이 형성되는데 196, 70년대의 미국의 히피 문화의 원조로 보면 된다.      


니체의 철학과 그의 굴곡진 삶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고 바그너에 대해 무한 찬사와 후일 그와 완전히 등지게 되는 것도 병으로 닳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그에게 일상적인 생활은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유년 시절 빼고 거의 평생을 병을 안고 산 이 사람의 질병은 온갖 내부 장기의 문제와 눈병 및 두통이었다. 눈은 빛에 너무 민감하여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과 구토는 반복되었다. 어느 해는 아픈 날이 200일이 넘도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곤 하였다. 게다가 자기 인생의 20%는 광인으로 지내고 1900년 사망했다.      


그래도 그는 20권이 넘는 책을 만들어내었다. 그 많은 저작은 그가 광인이 될 때까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니체는 자신의 책이 나올 때마다 밖에 알려지는지에 편집적으로 예민했다. 오랜 생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자신의 책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으로부터의 굴욕감은 도스토옙스키의 오랜 감옥생활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물론 그는 가정을 꾸리고 싶기도 했고 어떤 정착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삶은 떠도는 신세로서 약관 24세의 나이에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약 10년간의 기간은 그나마 떠돌이 생활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있으면서 그는 끊임없이 대학의 교편생활이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병을 달고 살면서 그의 떠도는 삶은 비록 그것이 병의 완화 또는 치료를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자작을 통해 자신이 유명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끊임이 없었다.     

 

루 살로메에게 청혼하였다가 거절당하고 대학을 그만둔 몇 년 후에 곧 정신 이상을 겪는다. 루와의 얘기는 세간에 크게 회자하고 있어 일반인도 많이 아는 것처럼 그녀와의 관계가 로맨틱하거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세기적 사건이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루가 그를 결혼 상대로 느끼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니체 여동생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생활 방식이 루라는 여자를 증오하게 만들어 복합적으로 생겨난 어찌 보면 니체 쪽에 대한 일방적인 껄끄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된다. 그가 찬양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기말은 일상적이진 않다. 19세기 말은 특히나 더욱 그렇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문명의 지식과 기계가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반면에 인간의 실존이 자신에 의해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풍조의 허무주의와 쇼펜하우어식의 염세주의, 도덕적 절망 등이 또한 남발되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떤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였다. 1893년, 니체가 광인이 된 지 4년 후, 니체의 철학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등에 업고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통해 예술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뭉크의 작품 또한 니체의 영향일 만큼 그의 철학은 시대를 대변했다. 심지어 그의 병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는 아포리즘식의 짧고 연속적이지 않고 비체계적인 그의 독특한 문체도 현대적 의사소통 방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할 만큼 그의 영향은 동시다발적이었다.    

  

약 10년 동안의 정신병자로 사는 생활 중 죽기 약 2년 전부터는 아무도 못 알아보는 글자 그대로 광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광인 상태가 오히려 영웅으로서의 추앙과 과장된 보도를 통해 그는 사회에 크게 알려지게 된다. 1차 대전이 가까워질수록 니체주의는 호전적으로 변모해갔다. 소위 그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위버멘쉬(초인)는 위대한 민족의 구원자쯤으로, 금발의 야수는 인종 개량의 정당성으로 변모되었다. 그의 저작을 총 관리해오던 여동생이 그것을 부추겼다. 그러나 니체는 전쟁 반대자였다. 그의 글 어디에도 전쟁을 찬양하는 구석은 없으며 민족주의나 폭력을 부추기는 것 또한 전혀 없다. 그녀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오빠를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 자신의 부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왜곡의 대명사였다. 왜곡은 나치 시대에서도 지속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소위 ‘힘의 의지’라는 사상을 잘못 오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니체의 사상을 정반대로 해석하여 단순히 힘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는 사후 더욱더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니체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니체는 자기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진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니체의 담론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그릇은 되지 못했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거짓 없이 살 수 없었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였지만 거대한 신전을 시시때때로 지어 올리며 자신을 믿음 안에 가두어 버렸다.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 인간 자신을 철학자, 점성가나 목사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니체는 인간의 이러한 덧없는 관습이 아니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관점에서 선악의 개념은 무엇이고 무엇이 대안인가를 사유했다. 니체는 삶 자체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싸웠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개인주의로서 쇠퇴하는 신앙과 과학 모두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가 보기에 신앙은 이미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개인 정신의 가치를 드높일 것이었다. 신은 이미 죽었으며 우리는 위버멘쉬를 신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 그의 자라투스트라는 신앙을 대신해서 세상을 정화한다.  


그의 논증 출발점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허황한 생각을 심어준 최초의 인물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형상에 관한 그의 주장으로부터 철학자는 자신의 편견을 논증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일반화시킨다. 그들의 보편화는 강요일 뿐이다. 과학 또한 문제가 있다. 과학이 종교 자리를 대체하면서 과학 이론을 도덕적 신조쯤으로 오인하는 점에서 과학도 진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진리는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니체는 후반기 작품인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의 본질을 이같이 탐구하고 자아의 본질에 관해 얘기한다. 르상티망은 노예가 나약함을 장점이라 믿게 하고, 희생과 억압을 도덕적으로 미화함으로 힘 있는 자들의 어리석은 관용에 복수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자애 정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르상티망은 단순히 질투나 분노로 해석하기보다는 타인과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심리적 불안감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러한 노예 도덕을 벗어나는 해결책은 위버멘쉬 정신이다. 자유롭고 긍정적이며 독립적인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버멘쉬의 도덕적 자질은 힘에의 의지, 생명력에서 나온다.    

 


홀링데일의 ‘니체’와 프리도의 ‘니체의 삶’은 니체를 완전히 분해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책에 약간의 차이점은 있으나 큰 줄기는 같아 니체의 깊이를 알고자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작가들의 문체가 다르므로 같은 것은 다른 문장으로 표현한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두 책은 우수한 니체 평전이라 말해주고 싶다.  

    

그가 40 정도의 나이에 결국 정신병자가 된 이유에 대해서도 유전이라느니 아니면 지나치게 경화된 그의 철학 사상에 대한 몰두 때문이라느니, 이런저런 말이 많으나 젊어서 매독을 앓은 것이 연유가 된 게 정설이다. 아프지 않은 기간과 정신병 상태가 아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최소 20여 권 정도의 저작을 만들어내었다. 비극의 탄생,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등 많은 저작이 있지만, 그의 철학 체계를 확실히 볼 수 있는 저작은 선악의 저편과 도덕 계보학이 아닌가 한다. 대단한 저작을 남겼음에 틀림이 없고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편을 통틀어 그에게 동정심이 우러나는 것이 너무 자주 아프고 결국 10년 넘게 정신병자의 상태에 있었을 니체가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사상은 전집이라는 어마한 분량의 글로서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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