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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Dec 28. 2020

헤겔

헤겔 전기, 테리 핀카드 지음


헤겔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그에 관한 책은 많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300쪽 정도 이내의 비교적 짧은 것들이어서 헤겔의 사유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런 경우, 헤겔의 생애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어 그가 왜, 어떻게 어떤 생각에 도달했고 어떻게 사유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의 사상을 알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배경을 나름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핀카드의 헤겔 자서전인 ‘헤겔’은 바로 그런 책이다. 내용만 860쪽에 이르고 부록으로 실은 정신현상학의 서문 등을 포함하면 모두 1천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헤겔 공부를 하는 나는 그에 관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므로 찬찬히 시간을 들였다.


이 책 ‘헤겔’은 헤겔의 탄생(1770)부터 죽음(1831)에 이르기까지 그에 관해 온갖 얘기를 그의 사상과 함께 풀어냈다. 연대기적으로 풀어냈으나 헤겔의 사상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로 보면 된다. 그의 유년기에서 신학교 시절 그리고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의 가정교사 시절과 그가 그렇게 바라던 예나대학에서의 교수 시절까지를 첫 단추로 저자는 놓고 있다. 예나 시절의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첫 단계를 정신현상학이 완성된 시점까지 포함한다. 사상적인 관점에서 정신현상학이 나온 후 그의 포괄적인 체계의 구상이 들어서고 ‘논리의 학’이 나온 시점인 예나와 하이델베르크 시절을 독립적인 2단계(1807-1817)로 본 것은 타당하다. 이제 베를린 대학에서의 법철학을 출판하고 역사 철학, 예술철학, 종교철학 등을 강의하는 단계가 사실상 마지막 단계로서 근대적 삶을 꿰뚫는 사유로서의 헤겔의 풍성한 시대인 1818에서 1826년에 이르는 삶이다. 나머지 4년은 마지막 날이란 제목으로 그의 생애의 노년의 황혼과 콜레라로 인한 병사로 끝을 맺는다.


헤겔의 사상에 디딤돌이 된 역할을 한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트의 비판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혁명이다. 전자는 헤겔의 사유가 배움을 거쳐 변천 및 천착에 이르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후자는 세계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철학이 말해져야 하는지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유럽의 지성계에 변방이었던 독일을 가장 중요한 중심 사유의 보고로 만든 심장 같은 것이었다.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이후의 모든 철학은 흘러나갔다. 당연히 이후의 철학은 칸트를 제일 먼저 접한 독일의 몫이었다. 난해한 그의 철학은 몰이해를 낳기도 했으나 결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칸트의 이분법에 대해 불완전성을 표현했을 뿐만이 아니라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만장일치로 수긍하지 않았다. 이분법의 해결로서 피히테의 자아, 셸링의 동일 철학이 이어졌다. 그러나 전체적 관점에서 뭔가 빠져 있는 형국이었다.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은 사유가 세계에 모든 규정을 부여한다는데 이때 주체와 객체는 근원적이 아니고 자기 부여의 본성을 먼저 논해야 한다고 휠덜린은 주장한다. (이 언급은 피히테의 자아 개념이 근본적이 아니라는 주장)  헤겔의 길은 정해졌다. 그는 휠덜린의 이 깊은 사유에 큰 영향을 받고 그것에 천착하였다. 헤겔의 주 질문은 근대의 도덕적, 정신적, 사회적 개혁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무엇인가였다. 헤겔의 목표는 근대적 삶을 실현하는 데 지침이 되는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헤겔에게 칸트는 인간 삶의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심각하게 빠뜨린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떻게 사유적으로 칸트를 극복하고자 했는가?


 헤겔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를 결정한다. 독단적 관념론자는 주체를 객체의 실재적 기반으로 여기고, 독단적 실재론자는 객체를 주체의 실재적 기반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은 둘 다 의식 안에 있으므로, 객관적인 것의 실재성 또한 주관적인 것의 실재성처럼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쌍방 간의 대립은 무언가 심층적인 것을 전제함을 함의한다. 칸트의 두 대립 관점을 보면 명확해진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즉, 이론(순수이성)적으로, 고찰하면 우리 자신을 인과 법칙을 따르고 시공 속에 있는 물체로 여긴다. 반면에 자신을 주관적으로, 즉, 실천(실천이성)적으로, 고찰하면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하는 대로 자유롭게 규범에 종속된 존재로 여긴다. 이러한 대립으로부터 의식의 주체는 주관적 관점에서는 자신을 내부로부터 볼 수 있고, 객관적 관점에서는 자신을 외부로부터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립에 선행하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무엇이 없으면 대립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과 셸링은 이를 절대자로 표현했고 헤겔은 더 나아가 이를 ‘이성’으로 보았다.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앙과 이성, 자유와 필연 등의 이분법적 요소들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으로 이는 우리 안의 대립이다. 즉, 동일 행위자가 두 관점을 모두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관점은 주관도 객관도 아닌, 사유와 세계의 통일이고 개념적 형식과 객관적 내용의 통일이므로 분리에 선행하는 통일을 전제로 한다. 절대자는 주체와 객체의 통일과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담보로 하므로 이성이 곧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은 항상 객관적, 주관적 관점을 모두 구현한다.


그러므로 물자체는 공허한 개념이며 이성이 추구하는 전체 안에 초월적 가상을 포함하지 않으며 이성이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전체는 행위와의 개별 판단을 의미 있게 해 준다. 이때 전체들은 정신이 특정한 역사적 기간에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의 추론적 구조이며 전체들의 전체는 인류의 역사이다. 그래서 그의 논리학은 이러한 정신의 추론적 구조의 명료화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의 기본적 사유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학은 그래서 칸트의 이율배반조차 자신의 범주 속에 귀속시킨다. 물론 범주 각각을 고유 영역에서의 변증법이라 명명하여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유와 존재 통일의 명료화를 꾀했다. 그러므로 헤겔이 보기에 논리학은 균질하고 고립된 사유의 놀이가 아니고 정신 안에 현전하고 작동하는 사유와 존재의 근원적 통일을 명료화하는 길이었다. 모든 판단 행위가 이루어지는 전체들의 전체는 ‘이성들의 공간’의 총체성이며 이념의 총체성이다. 이제 그는 '논리의 학'으로 자연, 사회, 예술, 종교, 역사, 철학과 관련하여 근대적 삶에 관한 규정을 위한 틀을 완성하였다.


그의 일관된 사유는 모든 분야에 걸쳐 이행되는데 베를린 대학에서 실현한다. 법철학을 출판하고 비록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출판되었지만 자연철학, 종교철학, 예술철학, 역사 철학 등 그의 사유의 중심인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논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자연철학을 빼고 아직도 유효하다.


이들에 대해 많은 얘기가 있으나 글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므로 이쯤에서 종결하려고 한다. 다만 베를린에서 어용교수로의 낙인은 비록 그 자신조차 이에 대한 빌미를 주기도 했으나 꼭 그렇게 봐야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신 개혁에 누구보다도 찬성하고 이를 뒷받침한 자였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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