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희 Jan 01. 2021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II권  칼 포퍼 지음

나치가 정권을 잡은 것은 1932년부터의 일이다. 나치의 반유대 정책은 급기야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탄압으로 이어져 유대인은 나치라는 조폭 집단이 이득을 취하는 영역에서는 더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집단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사람들의 예측은 1938년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현실이 되었다. 당시 조폭 관할 하의 영역에 머물렀던 유대인들은 일생일대의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독일 철학자의 대다수가 유대계이므로 이들이 미국 등 서방으로 건너가 나치에 대항하여 펜을 휘두른 것은 당연하였고 전후 세계 정치철학이 발전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칼 포퍼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논리실증주의의 비엔나 학파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 과학철학자였다. 그의 반증주의는 귀납 주의와 함께 근대 과학 이후의 연구 방법론으로 과학 연구의 방법론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공헌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된 관심은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런 그도 나치에 저항한 것은 당연하였고 나치를 일찌감치 전체주의로 낙인찍어 이들에 대한 인류적 경고를 하고 싶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저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책은 전체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역사 법칙 주의의 정체가 하나의 허구적 신화라는 것을 폭로하는 책이다. 저자는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닫힌 사회를 민주주의라는 열린 사회의 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그 시원을 철학에서 끌어내고 있다. 책의 1권인 전반부에서 포퍼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동원하며 그의 이상 국가론이 전체주의의 시원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앞부분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론과 플라톤의 변화에 대한 온갖 담론을 들먹이면서 전체주의의 시발점들을 알리는 것이라면, 2권인 뒷부분은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역사주의가 발전하여 세계가 망가졌는지 신랄하게 비난한다. 닫힌 사회의 담론은 근대에 들어와서 독일 관념론자들인 피히테, 셀링 및 헤겔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고 포퍼는 보고 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는 해결 방안도 논의한다. 이쯤 되면 포퍼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책의 제목으로부터 간단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사회’는 개개인이 결단을 내릴 수 있고, 비판적 관점을 수용하여 정보의 독점을 거부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자신의 결단과 행위로 역사가 진전되어 가므로 개인이 역사의 주체이다. 이와 대립적 관계의 ‘닫힌 사회’는 마술이나 초법적 금기의 위력으로 전체가 개인을 폭력적으로 규제하는 집단 사회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역사의 법칙과 운명의 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우는 사회이다. 고로 닫힌 사회는 역사주의에 기초한 전체주의의 사회이다. 모든 규범은 자연법칙처럼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여 개개인의 판단은 없고 오로지 국가(집단)만이 개개인의 잘못 유무를 판단하는 사회이다.  

    

역사주의는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준거하여 역사가 진행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역사주의자는 개인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사회 전체의 발전 법칙이 존재하여 이러한 법칙을 바탕으로 미래의 역사적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주의의 원리를 처음으로 제시한 철학자는 헤시오도스이나 변화의 관념을 발견한 헤라클레이토스가 근원적인 원조 격이라고 포퍼는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과정으로 사실들의 전체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를 물질적이고 안정적인 거대한 구조물로 본 기존의 관점(밀레토스 학자들을 의미)과 대립한다. 플라톤에게 사회적 변화는 타락, 부패 또는 퇴보였으니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것들에 안주하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제시한다. 그의 이상 정치는 형상 또는 이데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가 생각한 본래의 국가 성립과 끝에 이데아는 모두 안착하여 있어 중간의 단계는 변화를 거듭한다. 원래 이데아에 가까운 사회가 부패, 퇴보를 거듭하여 궁극적으로 형상이나 이데아를 닮은 이상 국가를 이룬다고 그의 국가론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이상 국가는 전형적인 닫힌 사회로서 전체주의의 사회이다. 이와 같은 닫힌 사회는 근대에 들어와서 독일 낭만주의, 비합리주의 철학인 관념론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유물사관으로 이론이 집대성되었다. 사상이 20세기의 사회주의와 파시즘으로 표현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부는 헤겔 철학으로 시작한다. 포퍼가 보기에 헤겔 철학 사상은 전체주의가 융성한 현대에 플라톤과 현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국가 내의 민족주의, 국가들의 투쟁, 힘의 국가의 약소국 지배 논리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 역사주의는 현대전체주의의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그의 독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한 플라톤의 본질주의가 헤겔 철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 이유는 헤겔 철학의 많은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포퍼의 주장을 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전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에 지배되어 있고 플라톤의 노예 본성론을 지지한다. 그의 최상국가론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 나타난 이론을 모방했다. 헤겔은 곳곳에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모방의 영향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개념은 변화하는 모든 것의 형상 또는 본질은 변화가 진행되는 마지막 상태와 같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본질 또는 형상은 플라톤의 영혼과 유사하다. 그런데 헤겔이 말한 본질 개념은 여기서 나왔다. 즉 이성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만능체라는 헤겔 주장의 시원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도 있다. 헤겔 역사주의는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자기를 실현하며 최상위의 단계인 절대지를 향하는 목적을 향해 스스로 움직여나간다. 각 단계는 앞의 단계보다 나아지고 완전하게 된다. 이러한 진보는 직선적이 아니라 변증법적 진보라는 것을 제외하고 변화에 대한 그의 관점은 퇴화의 역사를 주장한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변화 그리고 목적의 개념과 닮아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또는 본질)는 변화하고 있는 사물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적 관점도 물려받았다. 유기체적 본질은 정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증명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이렇게 증명할 수도 없는 어떤 명제를 과감히 주장하게 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의 영향이다. 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 등에 거론되는 본질에 관한 얘기를 보자. 본질의 기본적인 서술은 주어와 술어로서 정의되는 것과 정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참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 본질을 찾기란 절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플라톤은 결코 우를 범하지 않는 지적 직관 때문에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감각 기관보다 순수한 지적 직관에 더 신뢰를 둔 플라톤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많은 관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플라톤에 반하는 것이지만,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는 정신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가정 또한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본질주의는 ‘모든 지적 앎의 목적은 모든 본질에 대한 직관적 정의를 하는 것이다‘로 요약된다. 헤겔은 이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정의 외에 논증이 있다. 그러나 포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에 관한 주장은 빈약하기 그지없다고 일갈한다. 여하튼 이러한 본질주의는 말장난을 권장해주었고 따지는 것을 권장한 나머지 엉터리 철학을 낳게 하는 데 일조했다고 퍼는 비난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가장 비난받을 말장난의 결정체이다. 헤겔 역사철학의 뿌리는 본 바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헤겔 철학은 만능의 권위를 가졌고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어용 철학이었다. 그의 변증법은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합리적 논증이 아니라 모순 위에 세워진 것으로 모순을 자체 내에 받아들이는 체계가 변증법이었다. 변증법이 역사적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열쇠였다면, 그의 사상 속의 동일성은 현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으로 기존 체제와 질서를 옹호하는 단순 표현으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고 요약된다. 즉, 이성적인 모든 것은 참이므로 실제와 일치한다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주장으로 칸트를 비판하고 넘어서려 한다. 그런데 이성이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은 영역의 문제에 개입하려 하면 이율배반의 모순에 휘말리게 된다고 칸트는 잘라 말했다. 공상, 환상, 독단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주장 등은 허황한 울림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헤겔은 이율배반 같은 자기모순은 이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변증법은 칸트의 이원적 분류를 넘어서 물자체를 해결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변증법과 함께 헤겔 철학의 두 기둥을 이루는 동일철학은 변증법 응용의 한 경우이다. 이성이 곧 실재이므로 관념이 이성이라면 변증법적 방법을 통하여 절대 관념에 이른다면 곧 실재를 안다는 얘기이다. 이런 등식은 놀라운 점프력에 의한 환상적 주장일 뿐이다. 변증법은 사상의 자유에 대한 의견에서도 뒤트는 데 힘을 발휘하여 결국 국가가 객관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해괴한 결정을 내린다. 이런 주장은 허황한 논리에 불과하다고 포퍼는 역설하면서 그렇게 된 데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영향이 크다고 본 것이다.


헤겔의 패착은 그가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더욱 드러난다. 헤겔의 무지에서 비롯된 자연과학에 관한 주장들은 매우 무책임하다. 이 부분은 헤겔의 커다란 실책이다. 변증법은 이미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쯤으로 취급했을뿐더러 이러한 전문적 말장난에 의한 허황한 주장에 대한 헤겔 자신의 자부심과 청중들의 열광은 더욱더 흉측한 허풍으로 몰고 갈 뿐이었다. 물론 이는 자연과학에 국한된다고 할 수도 있다. 실험적 검증을 거쳐야 하는 자연과학은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기 때문인 것을 뉴턴역학이 나온 지 백 년이 되는 헤겔이 살던 시점에도 그는 과학의 방법론을 몰랐거나 아니면 모른 체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회과학적 영향은 매우 지대했고 오늘날도 그렇게 인정되고 있다. 그의 교육, 역사, 정치 및 도덕철학은 그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특히 극우와 극좌를 아우르는 특징이 있다. 헤겔이 부리는 마술적 논증을 분쇄할 만한 마땅한 대안도 없기 때문이다.  


 포퍼의 주장은 그런대로 일리는 있다고 본다. 헤겔이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국가철학자의 칭호를 받았을 때 그는 어용학자의 역할에 충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정신현상학이나 대 논리학, 엔치클로패티 등이 그 이전에 나온 것을 볼 때, 그런 저작들이 어용 역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포퍼의 강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그의 형이상학이 변화를 기술하고 있을지라도 본질주의는 범주와 명제를 기반으로 짜인 시간과 공간에 무균질적인 형식이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존재를 거론할 때 딱히 다른 사유로 보충할 만큼의 여지도 없는 게 그의 존재론이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해 얘기하려면 오직 그를 거쳐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역사의 변화가 아니라 변화의 본성에 관하여 사유하였다. 이처럼 후일 이를 역사주의에 적용하든 안 하든 이는 시원자와는 관계가 없다. 더 나아가 헤겔이 집중하려고 했던 것은 역사주의를 주장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 사회, 역사 등 모든 것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려 했다. 모든 것이 변화하니 그 변화를 자기의 사상에 담으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아무도 실행하지 못했던...  

  

이 책에서의 포퍼의 담론은 감정을 동원한 이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포퍼의 절제되지 않은 절규는 귀담아들을 것이 많다. 포퍼는 전체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역사 법칙 주의의 정체가 하나의 허구적 신화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전체주의를 근원적으로 비판한다. 물론 서구 사상이 플라톤처럼 닫힌 사회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 페리클레스나 소크라테스는 열린 사회를 추구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시작한 열린 사회는 근대 사회에서 본격화되었다. 열린 사회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열린 사회의 신념이 약화할 때는 언제나 다양한 모습으로 전체주의의 닫힌 사회가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인류는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전체주의의 공포를 이미 경험한 현대 사회를 열린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하도록 인류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세 스콜라 철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