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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Jan 13. 2021

보편적 가치

소크라테스의 덕

소크라테스는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다 간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러한 삶의 지혜로움은 자신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물론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어차피 무지 또한 상대적이 아니냐고. 그러나 진실로 무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무엇을 모르므로 질문을 수없이 할 수 있다. 특정의 주제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당대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은 그의 계속되는 질문에 평소에 확신하였던 생각들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무지를 확실히 깨달은 소크라테스는 질문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상 우리는 많은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고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윤리적 덕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이다’로 그의 사상을 대표하고 있다. 이때 덕은 오늘날의 덕과는 좀 달라서 기술까지도 포함한다. 앎이 특별히 애매해지는 것들은 바로 윤리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가 모른다고 한 것은 의문의 대상인 덕목에 보편적 앎이 있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치가 그저 표상적으로 드러난 것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몹시 꼴 보기 싫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모든 것을 상대적인 잣대로 치부하는 당시의 사회 영향이 매우 컸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사상에 대해 한마디도 글로 남긴 것이 없지만 후대 철학자들이 남긴 것으로부터 그의 보편적 앎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30여 대화편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곳에 그에 관한 얘기가 있기도 하고 그 외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특히 대화편에서 그의 사상을 많이 유추해낼 수 있다. 대화편의 초기는 소크라테스적 시기로서 소크라테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기간을, 중기는 과도기로서 소크라테스를 넘어 플라톤 자신의 견해를 모색하고 있던 시기, 후기는 원숙기로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한 시기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크라테스는 초기, 중기 편에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역할을 한다. 특히 초기의 많은 대화편은 결론이 없이 끝을 맺는데 이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논박술의 전형이고 소크라테스적 무지의 특징적 결과이다. 이에 비해 중, 후기 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대화편의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영민한 인물인지 살펴보자. 우리는 용기가 무엇이고 정의가 어떤 것인지 절제의 뜻이 뭔지, 우정, 경건 등은 이러이러하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훑다 보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괴감에 빠지며 이러한 윤리적 덕목을 정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대화에 임한다. 우선 윤리적인 단어에 대해 질문을 한다. 답변자는 윤리적 덕목이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두고 이렇다고 주장한다. 이에 응답하여 소크라테스는 그의 주장과 상충하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전제로 다시 제안한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질문의 내용이 또한 답변자의 신념과 삶 속에서 수긍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를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지라도 상충하는 것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원래 이것이라고 확실히 정의한 답변자는 이제 확실한 신념이 없어진다. 이처럼 질문과 답변이 반복되면서 답변자는 결국 자신이 처음에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실제로는 전혀 몰랐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논박술이다. 논박은 논증으로서 전제로부터 처음 주장의 모순을 끌어내는 추론의 한 방법이다. 논박술의 목적은 주제에 대하여 답변자가 처음 주장과 모순되는 말을 질문자가 드러나게 하여 답변자를 논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논박을 했는가? 의도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을 깨닫게 하여 얻어지는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답변자의 윤리적 삶 자체를 검토하고 비판하여 더 나은 윤리적 삶을 살게 할 목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소피스트들이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 나머지 무엇이 옳고 그름이 불분명해지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 아니라 참된 지식은 존재하고 그것으로부터 윤리적 판단의 기초가 확립되기를 원했다. 참된 지식은 잘못된 영혼의 삶을 정화하여 새로운 삶을 얻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참된 지식 추구의 목적은 선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함에 있었다. 궁극적 진리를 반어법을 사용하여 알아내고 싶었고 대답하는 사람 자신이 반성하도록 유도하여 그들 영혼을 보살피는 일을 최우선시하였다. 영혼을 바로 돌보려면 참된 지식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보다시피 철학적 문답법의 주제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였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이라고 하였다. 이때 아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앎이자 좋은 행위의 기준이자 행복한 삶의 조건을 지칭한다. 덕의 개별 항목으로서 경건, 절제, 용기, 정의의 본성과 각각의 덕 간의 연관성이 탐구되었다. 그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고 탐구하지 않는 삶은 삶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소크라테스의 증언 철학적 실천은 후대에 계승되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철학자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즉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세상에 거하는 동시에 세상 밖에 거했다. 도덕적 요구 및 그것이 함축하는 참여를 통해 인간과 사물을 초월하되 그것들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행위를 이끄는 의도의 순수성을 통해 저절로 구성된다는 관념을 소크라테스는 가지고 있었다. 순수성은 개인적 이득을 포기하면서 도덕적 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스토아학파 등 훗날의 실천적 행위자들도 소크라테스적 전통을 따른다. 선에 대한 사랑이 인간 존재의 기본적 본능이라는 사상을 낳았다, 이것은 사실 훗날 칸트의 도덕적 자율의 기본이 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은 변증법으로 대화의 형식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은 성숙하지 않은 정의에서, 더욱더 갖춰진 정의로 진행하거나 특수한 것들에 대한 고찰에서 보편적인 정의로 나아간다. 즉, 특수자에서 보편자로,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주어진 항목의 보편적 정의, 고정된 개념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가 귀납 논증과 보편적 정의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글로 남긴 것이 없고 오직 대화를 통해 자신의 대화 방법론을 설파했을지라도 논증의 방법으로서 변증법이 논리화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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