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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Feb 22. 2021

칸트의 비판철학

코플스턴, 회폐, 되링의 저작들

셸링과 헤겔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휠덜린이 칸트를 지칭해 ‘우리 민족의 모세’라고 할 만큼 칸트는 독일의 영웅이고 내가 보아도 독일에 극단적으로 소중한 자산이다. 세계철학사를 집필한 독일의 슈퇴리히는 그의 책에서 칸트의 저작에서 서양철학은 정점에 이르렀고 오직 한 사람의 사유 작업에 의해 이런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표현한다. 반면에 서양철학사를 집필한 러셀 등 영국인들은 칸트의 지면 할애에 매우 인색하다. 그것만 봐도 그는 걸출한 철학자이다. 미국 철학자가 철학사를 집필하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 듯싶은데 미국인 틸리의 서양철학사는 그런 점에서 공정하게 지면을 할애한다. 


찬사와 비판은 언제나 같이 따라다닌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해에 이미 주목받기 시작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식과 관련한 이성의 이론적 사용의 순수이성에 이어, 행위와 관련된 이성의 쓰임인 실천이성을 내놓으면서 ‘이성의 예술가’라는 표현을 빌려 철학이 순전히 철학적 담론으로만 진행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각각 인식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영역을 다룬 것이다. 이론적 인식은 오성이 감성보다 상위의 인식능력으로 부여되어 감성은 인식의 소재를 제공하고 오성은 범주의 기초개념과 원칙을 사용하여 소재를 조립한다. 이로써 자연 영역이 성립되며 자연은 오성의 입법성에 지배된다. 순수이성의 이론 영역에서 학문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주장했듯이 칸트는 실천 영역에서 윤리성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실천 영역에서는 실천이성이 감성적 욕망보다 상위 욕구 능력으로 부여되어 실천이성의 자유(자율) 개념이 지배하여 이론 영역에서 오성의 자연 개념이 지배하는 것과 차별성이 있다. 다만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가 칸트 자신에게도 부담이 되었을 터였으므로 판단력을 내세워 교각의 역할을 하도록 손을 보긴했다.


순수이성비판

순수이성에서 감성론은 인간의 감성이 받아들이는 경험의 근저에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이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알고 있어 인간 오감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공간과 시간의 형식이 덧붙여져 어떤 재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칸트는 합리주의의 본유관념을 받아들이며 경험주의의 경험 또한 받아들인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것은 감성만으로는 부족한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 무엇이 어떻다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오성이 작용하는데 오성 또한 선천적 형식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형식하에 최종 판단이 이루어진다. 칸트가 제시한 오성에서의 선천적 형식은 양, 질, 관계 및 양태이다. 이것으로부터 전칭, 단칭,,긍정, 부정,, 정언, 가언,,미정, 확정,, 등 모두 12개의 형식으로부터 범주가 만들어진다. 인간 오감으로 들어오는 무엇의 순수 개념 획득은 감성 및 오성의 단순 형식들인 공간, 시간 및 범주를 서로 결합한 결과로 이루어진다. 

칸트는 감성의 규칙 학문을 선험적 감성론, 오성 이상의 규칙 학문을 통틀어 선험적 논리학으로 칭하고 그 아래 오성의 영역을 다룬 학문인 선험적 분석론과 추리 능력의 이성을 다룬 선험적 변증론으로 나누고 있다. 분석론에서 오성의 범주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사고가 주관적이므로 범주 과정에서 범주가 객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증명 방법은 선험적 연역으로 감각기관, 구상력과 통각이라는 개념으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개의 종합활동을 통해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하므로 이루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감성과 오성이 그런 구조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감성과 오성의 메신저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상력이 산출하는 도식의 개념을 내세우는데 칸트는 도식을 통해 오성과 감성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성은 추리 능력으로 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는데 굳이 변증론으로 다루는 이유는 감성과 오성을 거쳐 고난도의 추리를 통해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 외에 이성은 경험이 없어도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 자아, 세계, 신 또는 영혼 같은 것들은 경험하지 않았는데 왜 인간 인식에 나타나는지도 넓은 의미의 이성의 추리 능력에 포함한다.

순수이성은 변증론을 제외하고 감성과 오성에 의한 인간 인식의 단계에 대한 해석이므로 이 순수이성에 의해 순수수학과 자연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칸트는 증명한다. 그 말은 역으로 형이상학이 변증론의 오류 추리에 해당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여하튼 칸트는 이성의 추리 능력에 의해 물 자체, 신, 영혼 같은 것을 생각하며 더욱더 깊이 생각하여 완벽한 진, 선, 미를 갈망하는 것을 인간 본성이라고 칸트는 선언한다. 다만 물 자체나 신, 영혼은 이성이 풀 수 없는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 순수이성은 물 자체 같은 것을인식할 수 없다고 선을 긎는다.


실천이성비판

실천이성은 감성적 규정 근거, 충동 또는 욕구 및 열정, 쾌락의 감각 등과는 독립적으로 행위를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제시한 것들을 빼면 이성만 남는다는 뜻이다. 칸트는 이러한 실천을 자연법칙에 따른 행위 능력이 아니라 법칙을 파악하여 원리를 상정하고 원리에 따라 행위 하는 능력이라 보았다. 이때 실천이성은 의용하는 능력으로서 의지이다. 의지는 이성적이고 행위와 관련된 이성으로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증표 역할을 한다. 

의지가 실천이성인 윤리학을 규정짓기 위해서 첫째로 윤리성의 개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다음에 규정된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하는데 인간은 정언명법에 맡겨진 존재이며 유한한 이성적 존재이다. 윤리성의 원천을 의지의 자율에서 발견하고 이러한 윤리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하면 실천이성의 목표는 완수된다.

칸트는 윤리성을 규정짓기 위해 ‘선의지’만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한다. 제한조건 없이 개념에서 선하고 무제약적이고 그 이상의 목적 없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오로지 선의지만 단적으로 선한 것으로 규정지으므로 개인의 여러 특질(기질, 성격 등)은 선할 수는 있으나 제한적이다. 칸트는 선의지의 본질을 의무 개념을 내세워 증명을 시도한다. 윤리적 의무를 어떤 규정을 근거로 행할 때 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데 개인적 윤리성은 단순히 어떤 의무적 수행을 했다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는 조건적으로 선할 뿐이다. 선의지란 의무 자체를 위하여 의무적 실행 행위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합법성과는 달리 행위 자체에서는 확립되지 않고 오직 행위의 규정 근거에서만 확립된다. 이는 합법성과 도덕성의 차이로서 선의지는 도덕성에 준거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덕성을 판정할까?

칸트는 도덕성을 판정하는 최고의 기준은 ‘정언명법’으로 규정한다. 정언명법은 유한한 이성적 존재의 조건에 있는 윤리성의 개념으로 제한 없이 타당한 요구로서 조건 없이 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법은 무제한 적 선의 규준 준수의 윤리적 책임이므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정언명법의 기본 형식은 준칙임과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준칙이란 행위의 주관적 원칙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를 평가하는 주된 윤리이다. 그래서 정언명법은 너의 행위 준칙이 마치 너의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언명법은 오직 준칙에만 관계하여 규범윤리학과는 다르다.

칸트는 정언명법을 모든 윤리적 행위의 최고 척도로서 내세우고 척도에 준거하여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최종 근거로서 ‘의지의 자기입법성’, 즉, 의지의 자율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율이 정언명법의 요구를 충족케 하므로 행복 원리에 의해 윤리성을 제한하는 도덕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행복을 주관적 만족 이상의 것으로 규정하여 절대적 최고의 목적으로 주장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최고선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최고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고 칸트에게는 최고선을 의지로 이루는 것이다. 칸트는 자율적 행위를 자연적 경향이나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구제하려는 마음, 정직성의 준칙을 견지하는 사람의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의 단순한 욕구나 사회적 존재 이상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적 자아, 순수한 실천이성으로 구성된 도덕적 존재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함의한다. 

즉, ‘네가 인간이면 너에게 너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준칙에 따라 나쁜 짓을 할 생각도 하지 말아라’가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이다.     


판단력 비판

오성이 물(物)을 감성 표상으로 여기지만, 실천이성은 물을 물 자체로 여기므로 오성과 실천이성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두 개의 입법을 가진다. 즉, 순수이성은 물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나, 실천이성에서는 물 자체가 등장해야 도덕적 자율이 성립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법으로 인해 독립적인 양자 사이의 연결이 확실히 필요해 보인다. 실천이성이 물을 물 자체로 보기 때문에 감성이 접근할 수 없는 반면에 실천이성에 의해 설정된 도덕률의 욕구를 감성계에서 실천해야 하므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영역을 결합하는 어떤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서 언급되지 않은 이러한 능력을 반성적 판단력이라 한다. 쉽게 얘기해서 미술품의 감상을 통해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것들은 순수이성에서 다루지 않아 어차피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칸트는 이러한 판단력을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가교 구실을 하는 매체로 끌고 감으로 모든 비판을 끝맺으려 한다. 

칸트 비판 사상의 종결을 보여주는 판단력 비판은 ‘미학’이다. 가장 오래된 미학 이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꼽을 수 있으나 미학의 효시는 비움가르텐의 저작이다. 비움가르텐은 진선미를 대변하는 것으로 논리학, 윤리학 그리고 미학을 들었다. 논리학의 대상은 진리이고 윤리학의 대상이 선인 것처럼 미학의 대상은 ‘미’다. 그러므로 진선미는 오성, 의지, 감각이 각각 파악하는 물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비움가르텐은 미를 완전성의 혼란된 감성적 감각이자 감각된 진리로 정의하고 미적 향락은 혼란된 인식으로 규정하여 여 미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미에 대한 경험적 해석 또한 칸트 직전에 존재하는데 바로 버크의 미에 관한 원천 연구이다. 그는 미를 쾌적과 같다고 보았고 미적 향락은 감각적 쾌락으로 규정하여 비움가르텐의 입장과 상반됨을 보여주었다. 순수이성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경험하였듯이 칸트는 미학에서도 두 사상의 대립에 직면하고 이를 올라선다. 현대 미학은 칸트가 남긴 판단력 비판의 모든 것을 양식으로 삼는다. 

순수이성에서도 판단력은 나오는데, 오성의 범주라는 보편적 법칙이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개개의 특수한 대상을 이에 준거하여 인식하는 이른바 규정적 판단력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특수만이 부여된 상황에서 보편을 발견하는 판단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이 판단으로 우리는 자연을 순수이성에서 언급되는 자연의 오성적 합법칙성과 실천이성에 부여된 목적과의 일치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성적 판단력에 따르면 자연의 합법칙성은 자연의 종국목적에 따르는 것이 된다. 자연이 합목적적이 되어 감성계에서 초감성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존재하게 된다. 이 판단력은 합법칙성에서 순수이성의 오성에 유용한 것이고 합목적성에서 실천이성을 지지한다.

반성적 판단력의 합목적성은 자연을 자유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게 한다. 합목적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쾌’와 결부된다. 이렇게 느껴지는 쾌는 판단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순수이성에서 감성이 오성과 연계되고 감성적 욕구가 실천이성과 관계되는 것과 대비된다. 합목적성은 주관적(형식적)인 것과 객관적(실재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 주관적이란 어떤 물이라는 대상의 직관이 오성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여 우리에게 합목적적으로 보여 마음에 쾌가 일으키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를 미적 합목적성이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물(예로 아름다운 그림)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쾌감에 의해 평가하는 능력을 ‘취미’라 한다. 반면에 물의 형태가 본질 또는 조건과 일치하는 경우(예로 새의 날개: 나는 조건과 일치)의 물은 객관적 합목적성을 가진다. 이러한 것도 쾌에는 속하지만, 미적이 아니라 합목적으로 인식되어 야기되는 논리적 만족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미적 합목적성은 미적 쾌감으로 인식되고 실재적 합목적성은 오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반성적 판단력은 미적판단력과 목적론적 판단력으로 나뉘고 전자는 예술이고 후자는 자연 목적이다.

감정에 의한 미의 평가능력인 취미 판단은 대상과 이를 판단하는 주관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즉 대상의 인식이 목적이 아니다. 예로 한 폭의 풍경화로부터 우리는 나무의 개수, 어떤 동물, 어떤 곳의 풍경인가 하는 인식과는 관계없이 대상의 표상이 나의 마음에 어떠한 느낌을 주었는가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낀다.               


책, 회페의 ‘임마누엘 칸트’와 되링의 ‘칸트철학 입문’, 코플스턴의 '칸트'는 컨트가 서문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주제로 칸트의 사상을 풀어 내렸다. 칸트의 저작에 대한 해설과 함께 후대 또는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 사상과 비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알다시피 칸트의 철학이 독일관념론이라는 거대 담론의 탄생에 백 퍼센트 이바지했고 그 이후 세계 철학에 준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회페는 그의 저작 아리스토텔레스도 깊은 사유를 녹여내는 헌신의 재능이 있었던 것처럼 이 저작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코플스턴은 사양철학사를 가장 길고 깊게 만든 인물로 그의 이해의 깊이는 상당하므로 칸트에 대한 저술도 그와 같다. 여기에서 배경과 후대 철학자에게 끼친 영향은 분량상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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