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르네 데카르트는 고대 자연과학이 흔들리고, 인간 이성이 사상 최초로 제 자리를 잡아가려는 몸부림치는 격정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저작인 방법서설과 성찰을 통하여 보인 일관된 관점은 인간 이성의 역할론이었다. 스콜라철학이 유명론으로 대단위의 막을 내리면서 이성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을 기억하면 데카르트가 이성 사용의 방법론을 주장한 것은 이상치 않다. 그는 중세의 오랫동안 벌어진 보편자와 개별자 간의 치열한 역사적 논쟁의 현장을 글자를 통해 목도 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자신이 이성 역할 탐구의 선구자이자 종결자 역할을 자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문제를 풀 핵심 열쇠를 방법으로 보고 지독한 의심을 생각해 내었다. 진리로 여겨질 수 있는 무엇은 독한 의심 끝에 나오지만 최종 결과 또한 지독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차마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데카르트는 깊은 생각을 했음이 틀림이 없고 너무 깊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수행한 논증적 판단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 확신했다. 그러한 것을 방법이라 칭했고 그의 <방법서설>은 보편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안내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얘기한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자신의 방법이 매우 개연적으로 맞을 것이라는 자기 이성에의 채찍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나, 자기의 깊은 이성적 사유로부터 나온 결론이니 결코 아무나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저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방법은 연역적이다. 어떤 과학적 사실을 두고 그 갈래를 따지고, 최종의 절대성을 담보로 그 절대성의 갈래 – 이 부분은 사실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준거가 확실치 않다 –로 그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의 확신을 주장한다. 그러한 체계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골격인데 방법으로서의 그의 체계를 따르는 – 따를 수밖에 없는 – 그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공격한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엄밀한 기계론적 관점에 많이 기울어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뒤집으려 노력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를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방법서설은 이성적 사유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고 이성과 물질을 나누는 그의 철학관은 이원론에의 구체적 시발자가 되기에 족하다. 이성적 사유를 사용하는 방법은 연역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철학은 그러할지라도 과학은 귀납적이다. 근대 자연 철학에서 그처럼 과도기에 서 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프랑스가 근대과학의 창시자로서 데카르트를 주장하는 것도 단지 그가 프랑스인이어서가 아닌 그 무엇이 데카르트에겐 있었다. 설령 그의 많은 부분이 틀렸을지라도 무엇인가 근대과학의 방법론이 잡힐 듯 말 듯 했던 그의 사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서설은 과학 하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 하는 방법이다.
<성찰>은 방법서설 이후에 나온 저작으로 연역으로 진리를 도출하는 방법을 담은 체계적 서술서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 이성적으로 확실한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는 실재에 대한 의문이며 만약 의심하여 단 하나라도 아닌 듯하면 또 의심한다. 일상에서 확실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실은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물체에 대한 인식이 그저 지나칠 일이 아닌 게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는 그 속성은 변하는 것처럼 느껴져 과연 변하지 않은 보편적 속성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는 많다. 데카르트는 그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므로 보편성을 띤 속성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모두 6개로 나누어진 성찰은 데카르트 자신의 ‘현존’을 논증하고 곧이어 신의 현존을 진리의 원천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신으로부터 받은 지성이 명약관화하게 판단하는 것은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이른다. 전형적인 연역의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덤으로 얻은 것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이다. 의심은 매우 체계적이어서 결론을 끌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질을 빼버리면 정신이 남고 그가 현존함을 안다. 상상된 것은 참이 아니라도 상상력은 현존이며 사유의 한 부분으로서 비록 실체가 아닐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정신이 물질과 분리될 수 있다. 물체에 대한 인식은 단지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고 이해하므로 지각되므로 정신이 인증되는 것은 자명하다. 물체의 보편적 속성은 연장, 연장적 사물의 형태, 양, 존재 장소, 지속되는 시간뿐이라는 것도 이러한 사유로부터 나온 것이다. 연장 등 위에 제시한 것들 외에 물체를 규정짓는 다른 어떤 것도 물체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한 진리 탐구의 결정판이 <철학의 원리>이다. 그의 전제는 그의 존재, 신의 존재이다. 이 둘을 으뜸 원리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의 올바른 생각, 고로 그 생각은 진리이다.’로 논증한다. 물론 여기서 설령 첫 번째 전제가 참일지라도 연이은 전제는 참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지하다시피 그의 논증에 의한 진리 탐구는 오늘날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하비의 혈액순환에 대한 그의 진리 주장, 우주의 별들 운행에 관한 소용돌이 이론, 자석의 자성에 근원에 대한 괴이한 논리, 빛에 대한 실험 없는 결론 등 모두가 틀렸다. 그만큼 실험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의 사유 방식, 즉, 자신의 현존, 신의 현존, 신의 절대성, 그러므로 확실한 이성적 유추가 참이라는 논리는 현존을 제일원리로서 내세운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참인지 내가 충분히 명석판명 하게 지각하고 있지 않을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명석판명 하게 지각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여기에 신을 끌어들인다. 명석판명 하게 인식된 것이 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인식된 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 없으며 신한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제일원리가 참이면 그의 결론은 반드시 참이겠지만 제일원리라고 내세운 것이 참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에 합리론의 맹점이 있다. 경험론이 터질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