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천동설 체계는 별들의 위치 등을 올바로 알게 하고 미래를 예측하도록 제작되었다.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기반으로 고안되었으나 행성의 역행 운동, 속도 및 밝기 변화와 계절의 길이가 다른 것을 설명하는 장치들이 설치되었다. 행성 변화 문제는 공전 궤도를 따라 행성 자체가 작은 원을 그리며 운동하도록 주전원으로 해결하고, 계절의 길이 변화는 지구가 동심원의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이심률을 설정하여 해결되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이 둘이 실재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우선 주전원이 수정 천구 안에 물리적으로 어떻게 위치하는지 설명이 없으므로 상호 간의 관계가 소홀하였다. 더군다나 이심률의 도입으로 우주의 중심과 지구 중심은 같지 않게 되었다. 즉, 천동설에 중요한 것은 별의 위치 등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얻는 것이지 실제로 주전원이 존재하는지, 존재하면 천구와 어떻게 조화롭게 연계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이심률로 인해 우주와 지구의 중심이 빗나가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예측력까지 갖춘 천동설은 매우 우수한 체계였음에도 오차는 있었다. 오차는 아주 작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따라 축적되므로 점점 더 커졌다. 임시방편으로 수정 보완은 이루어졌으나 수백 년 동안 쌓인 오차는 커져만 갔다. 급기야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인 16세기에 오차는 일상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만큼 커졌다. 계절의 절기를 아예 맞추지 못할뿐더러 보름달이 떠 있는 날에 초승달이 뜬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지동설은 지구가 다른 행성과 함께 태양 주위를 도는 새로운 체계였다.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달, 하나뿐이다. 행성의 역행 운동은 실제 운동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행성의 궤도와 겹침으로 나타나는 외관상의 운동이라고 하였다. 지동설은 천동설로는 가능하지 않은 행성들의 순서가 필연적으로 고정될 수 있고 태양에서 각 행성 간의 거리가 명확히 확립되는 장점을 가졌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가 있다. 변화에는 진리라고 여겨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회적 통념도 작용했는데, 실제로 그의 저작은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신대륙의 발견으로 하나의 대륙 개념이 깨진 사례를 들고 있다.
16세기는 여러모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가 위협받는 시기였다. 세기말에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별은 낮에도 보일 만큼 밝았고 일 년 넘게 밤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없던 별이 새로이 생겨났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는 지구 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천상 세계는 불변으로 별의 생성과 소멸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코 브라헤가 지구와 별까지의 거리를 알기 위해 일주 시차를 측정했으나 관측 불가였다. 당시에는 달의 일주 시차가 측정 가능하여 지구와 달까지의 거리가 알려졌다. 측정이 불가한 것은 시차가 너무 작기 때문이므로 지구에서 별까지의 거리가 달보다는 크다는 의미이다. 관측된 별은 새로이 생겨났으므로 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어야 하는데 실지로는 천상에 속한 별이다. 연이어 나타난 혜성은 혼란을 더 가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혜성이 달 아래의 지상에서 일어나는 기상 현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브라헤가 관측한 혜성은 금성 언저리에 있어 달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행성의 천구를 관통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로써 혜성은 기상 현상이 아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정 천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의문시될 수밖에 없었다.
지동설이 새로운 체계일지라도 주전원과 이심률을 여전히 채택하고 있었고 오차 또한 해결되지는 않았다. 오차는 천동설과 같거나 오히려 더 컸다. 이 문제는 케플러가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고 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데이터를 세밀히 분석한 케플러는 고심 끝에 행성의 운동에 관하여 세 개의 법칙을 발견했다.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제1 법칙으로 주전원 및 이심률이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원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케플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의심 없는 완전체였다. 그러므로 천계의 질서 정연과 조화의 상징인 원의 마법을 깨뜨리는 일이 케플러에게 매우 어려웠다. 역설적으로 자연현상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 그만큼 관측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원으로 행성들을 회전시키는 천구의 개념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회전시켜 타원을 만들 수 있는 입체는 없기 때문이다.
제2 법칙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 휩쓸고 지나간 면적은 시간에 비례한다. 시간에 비례하므로 행성은 근일점에서 가장 빠르고 원일점에서 가장 느리게 운동한다. 제3 법칙은 '행성 공전 주기의 제곱은 장 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로 행성의 운동 양상이 복잡한 것으로 밝혀졌다. 모든 법칙은 관측 결과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궤도가 완벽한 원 대신 타원이라는 것도 운동의 속력이 균일하지 않은 것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주가 조화로운 질서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면 행성의 운행은 간단히 선형적 비례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케플러는 그가 굳건히 유지해 온 미학적 관점의 믿음을 결국은 버려야 했다. 주어진 데이터의 정밀한 분석이 행성의 운행을 올바로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법칙은 후에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도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는 비례 관계의 단순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운용되도록 하는 중력 법칙에 있음이 뉴턴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문제에 결정타를 날린 갈릴레이 얘기를 해야 한다. 갈릴레이는 이전까지 눈으로 천체를 관측한 것을 넘어 기구를 사용하여 별을 관측한 첫 번째 인물이다.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한 것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직간접적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금성의 위상 변화였다. 위상의 변화는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돌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달은 산과 계곡으로 구성되어 지구와 같은 구조였다. 지구는 흙으로 구성된 유일한 천체이고 그 외 모든 별은 부드럽고 매끈한 완전 구형이 아니었다. 관측된 목성의 4개의 위성은 천동설의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지구 외에 다른 행성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 발견되므로 지구가 회전하는 천체를 가진 유일한 행성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태양의 흑점을 통하여 자전을 발견했다. 태양은 완전체도 아니고 불변적이지도 않고 지구만 자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망원경을 통해 본 천구의 붙박이별은 맨눈으로 관찰되는 별보다 훨씬 많은 별이 있었다. 이 모두가 천구에 붙어 있기는 무리로 보였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100% 확신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와 갈릴레이의 대립은 지동설을 주장하거나 근거가 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하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출판된 지 70년이 지난 코페르니쿠스의 책도 판매 금지되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교회와의 논쟁을 포기함으로써 갈등은 극적으로 봉합되었다. 싱겁게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포기는 오히려 과학 자신의 지위를 굳건하게 했다. 이제 더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진실을 꿰맞추는 위대한 자의 도래를 기다리는 17세기 격동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