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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Apr 04. 2021

실천이성

철학혁명

인식을 다룬 순수이성은 오성이 감성보다 상위의 인식능력으로 부여되어 감성은 인식의 소재를 제공하고 오성은 범주의 기초개념과 원칙을 사용하여 소재를 조립한다. 순수이성으로 자연 영역이 성립되며 자연은 오성의 입법성에 지배되어 자연과학 등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포섭된다. 하지만 순수이성은 순전히 이론적 영역에 속하므로 자유 의지, 불멸성, 신의 존재 같은 형이상학적 이념에 대해 전혀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설령 모두가 순수이성으로 증명된다손 치더라도 자연과학 지식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인식의 영역과는 관계가 없고 실천적 또는 윤리적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의 실천적 영역에서 이성이 도덕 법칙을 명령하도록 윤리적 타당성을 주장한다. 실천 영역에서는 실천이성이 감성적 욕망보다 상위 욕구 능력으로 부여되어 실천이성의 자유(자율) 개념이 지배하여 이론 영역에서 오성의 자연 개념이 지배하는 것과 차별성이 있다. 


과학적 인식에서 선천적 요소를 떼어내어 체계적으로 인식을 설명하려는 방대하고 난해한 시도가 순수이성비판이라면 도덕의 선천적 또는 형식적 요소를 떼어내어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실천이성비판이다. 이는 의무와 도덕률을 인간 행위에 입법하는 이성에 기초를 둔 것으로 도덕적 실천 또한 어떤 형식에 있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 이성은 순수이성에서 다룬 뉴턴의 과학 세계와 도덕적 경험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를 조화시키려는 목적이 이에 있다.


실천이성은 감성적 규정 근거, 충동 또는 욕구 및 열정, 쾌락의 감각 등과는 독립적으로 행위를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필요와 본능에 의한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 이성에 의해 이와 같은 감각적 본성을 억누름으로 도덕 법칙에 의해 지배되어 자유롭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행위적 실천을 자연법칙에 따른 행위 능력이 아니라 법칙을 파악하여 원리를 상정하고 원리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이라 보았다. 이때 실천이성은 도덕 법칙의 지식에 의해 감각적 욕구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지이다. 의지는 이성적이고 행위와 관련된 이성으로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증표 역할을 한다. 의지가 실천이성이도록 윤리학을 규정짓기 위해서 우선 윤리성의 개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다음에 규정된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인간은 정언명법에 맡겨진 존재이며 유한한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끌어낸다. 윤리성의 원천을 의지의 자율에서 발견하고 이러한 윤리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하면 실천이성의 목표는 완수된다.


칸트는 윤리성을 규정짓기 위해 ‘선의지’만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한다. 선의지란 제한조건 없이 개념에서 선하고 무제약적이고 그 이상의 목적 없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오로지 선의지만 단적으로 선한 것이지만, 개인의 여러 특질(기질, 성격 등)은 선할 수는 있으나 제한적이다. 인간이 윤리적 의무를 어떤 규정을 근거로 행할 때 선의지에 준거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 윤리성은 마음에 우러나옴이 없이 단순히 어떤 의무적 수행을 했다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는 조건적으로 선할 뿐이다. 그렇다면 선의지란 의무 자체를 위하여 의무적 실행 행위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합법성과는 달리 행위 자체에서는 확립되지 않는다. 선한 행위를 했다고 모두 도덕적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성은 행위의 규정 근거에서만 확립된다. 법을 지킨다고 반드시 그가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선의지는 정의상 합법성보다는 도덕성에 준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성을 어떻게 판정하느냐이다.


칸트에게 도덕성을 판정하는 최고의 기준은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유한한 이성적 존재의 조건에 있는 윤리성의 개념으로 제한 없이 타당한 요구로서 조건 없이 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한한 존재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 제한 없는 선을 행하라는 뜻이다. 이런 식의 명법은 무제한 적 선의 규준 준수의 윤리적 책임의 결과이므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정언명법의 기본 형식은 준칙임과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를 하는 것이다. 준칙이란 행위의 주관적 원칙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를 평가하는 주된 윤리이다. 그래서 정언명법은 너의 행위 준칙이 마치 너의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언명법은 오직 준칙에만 관계하여 일반적 규범 윤리학과는 다르다.


칸트는 정언명법을 모든 윤리적 행위의 최고 척도로서 내세우고 척도에 준거하여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최종 근거로서 ‘의지의 자기입법성’, 즉, 의지의 자율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율이 정언명법의 요구를 충족케 하므로 행복 원리에 의해 윤리성을 제한하는 도덕 이론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을 주관적 만족 이상의 것으로 규정하여 절대적 최고의 목적으로 주장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최고선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최고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고 칸트에게는 최고선을 의지로 이루는 것이다. 칸트는 자율적 행위를 자연적 경향이나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구제하려는 마음, 정직성의 준칙을 견지하는 사람의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의 단순한 욕구나 사회적 존재 이상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 자아, 순수한 실천이성으로 구성된 도덕적 존재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함의한다. 즉, ‘네가 인간이면 너에게 너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준칙에 따라 나쁜 짓을 할 생각도 하지 말아라’가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이다.     


이로써 이성의 이론적 영역과 실천적 영역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순수이성은 물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나, 실천이성에서는 물 자체, 칸트가 언급한 선의지는 물자체, 가 등장해야 도덕적 자율이 성립한다. 이처럼 둘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두 개의 입법을 가지므로 이 둘을 연결하는 인간의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실천이성이 물을 물 자체로 보기 때문에 감성이 접근할 수 없는 반면에 실천이성에 의해 설정된 도덕률의 욕구를 감성계에서 실천해야 하므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영역을 결합하는 어떤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반성적 판단력이라 한다. 


반성적 판단은 자연을 순수이성에서 언급되는 자연의 오성적 합법칙성과 실천이성에 부여된 목적과의 일치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반성적 판단력에 따르면 자연의 합법칙성은 자연의 종국적 목적에 따르는 것이 되어 자연이 합목적적으로 되게 한다. 그러므로 감성계에서 초감성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존재하게 된다. 이 판단력은 합법칙성에서 순수이성의 오성에 유용한 것이고 합목적성에서 실천이성을 지지한다. 반성적 판단력의 합목적성은 자연을 자유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게 한다. 합목적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쾌’와 결부된다. 이렇게 느껴지는 쾌는 판단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순수이성에서 감성이 오성과 연계되고 감성적 욕구가 실천이성과 관계되는 것과 대비된다. 이로써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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