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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Apr 03. 2021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철학혁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후 거의 변화가 없던 인식론은 로크에 의해 진전이 있었고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칸트이다. 인식에 대한 그의 관점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인간이 어떻게 인식에 이르는가를 다룬 것을 넘어 인식의 한계를 규정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조차 바꾸어 놓았다. 감성과 오성은 서로 뗄 수 없는 단계적 인식의 과정으로 경험을 통하여 개념이 형성되는 필수적인 인식의 도구로서 경험과 개념은 인간이 가진 감성과 오성의 능력이다. 외부로부터의 대상은 감성과 오성 각각의 선험적 형식을 통하여 해체되고 조합된다. 선험적 형식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규정이므로 외부 대상과는 무관하다. 만약 인간이 빨간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이라면 사과가 빨갛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대상 자체에 있지 않고 대상을 직관하는 인간의 인식 조건을 따른다. 그렇다면 인식의 주체는 대상이 아니라 정신이 주체가 된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사과가 빨갛다’라는 말은 주어와 술어가 서로 독립된 개념이다. 사과라는 개념이 빨강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 ‘는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정의적 문장이다. 칸트는 전자를 종합판단, 후자를 분석 판단이라 하였다. 종합판단은 술어가 주어 속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술어는 주어에 새로운 개념을 더해준다. 두 판단 중에 분석 판단은 경험과는 무관하고 필연성과 보편성을 담보로 하므로 칸트에 의하면 분명히 선험적이다. 반면에 종합판단은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후천적이다. 사과가 빨갛다고 한 것은 관찰의 경험 이후의 판단이고 사과가 특정의 색깔을 가진 것은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그렇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이 있을까? 칸트는 수학, 물리학이나 형이상학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있음을 얘기한다. 두 숫자를 연산하여 새로운 숫자가 도출되는 경우는 필연적이며 보편적이므로 선험적이다. 새로운 수는 두 수와 연산자의 개념들이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결과로써 종합적이다. ‘두 점을 이어 최단 거리는 직선뿐이다.’라는 기하학의 명제 또한 종합판단에 속하는데 직선은 양이 아니라 질의 개념을 포함하는 데 비해서 최단이라는 용어는 양을 표현하므로 결과의 도출은 종합적이다. 물리학에서도 선험적 종합판단을 포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질량 불변의 법칙은 불변을 알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질량을 관찰한 것이 아니므로 선험적이고 질량과 불변은 종합판단이 없이 불가능하다. 선험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 수학의 명제, 자연과학의 원리 등이 이에 속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에서의 시간과 공간, 운동, 작용 또는 힘의 개념 또한 선험적 형식의 산물로 생각하였다. 만약 이것들이 선험적이 아니고 경험이 요구되면 개연적 결과만을 얻을 수밖에 없으므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원리들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이로써 칸트는 필연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순수수학이나 자연과학이 순수이성으로 가능함을 증명한 셈이다. 


그런데 선험적 종합판단은 외부의 대상과 인식하는 정신과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한다. 만약 외부로부터의 대상을 주체로 우리가 인식한다면 실제로 경험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맞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후험적 판단이다. 그러나 선험적 종합판단은 경험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만약에 정신이 수동적으로 단지 대상들의 정보만 수집한다면 그 특정의 대상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게 될 것인데 실제로 정신은 포괄적으로 모든 대상에 관한 판단을 내린다. 예로 과학적 지식은 미래에 대한 정보까지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이 지식은 선험적이며 종합적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대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의 작용에 맞춰진다. 인식을 직관하는 객체 주관성의 인식 조건을 따른다는 획기적인 인식 체계의 전환이다. 칸트가 기술한 바와 같이 이를 철학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 일컫는데, 이는 대상 인식을 주관과 떨어져 있는 사물을 보는 기존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인식에 선험적 요소를 분리하여 위대한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인식 체계의 관점의 획기적인 변환은 가히 인식론의 총체적 완성이라는 극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선험적 인식은 인간 이성의 한계 또한 규제하므로 우리가 이해하는 외부로부터의 대상은 우리가 인식한 결과로써의 대상이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는 절대로 아니다. 인식은 경험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감성과 오성이 특정의 조직화된 방식으로 작용하므로 우리가 인식을 통해 아는 사물은 원래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는 아니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시간과 공간과 범주라는 필터가 씌워진 안경을 끼고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의 사물은 이 필터를 거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물은 우리에게 나타난 대로의 대상일 뿐으로 사물 자체는 따로 존재하여 이를 물자체라 한다.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한 개념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물자체의 개념은 이성의 한계를 규정한 것으로 인식하는 정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현상계일 뿐, 비현상계는 초월의 영역이다.


물자체와 같이 자유의지, 불멸 또는 신의 개념은 감각을 통해 인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들에 대해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보하는 선험적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인간 이성은 감성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사유가 되기만 하는 초감성적인 것으로 오직 현상계에서만 작동하는 범주들이 비현상계에서는 무의미해진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현상계와 비현상계를 혼동하여 현상계에서 만의 작동 방법을 비현상계에도 적용하여 오류에 빠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역에 관한 지식을 공급할 수 있는 형이상학은 없다. 이로써 원래 칸트의 두 목적은 달성되었다. 첫째로 인과성에 대해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은 흄을 반박하여 수학과 물리학에서 선험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둘째로 라이프니츠 등의 독단적 이성론에 반대하여 형이상학에서 초감성적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렇다고 칸트가 형이상학을 무조건 배격했다고 보면 안 된다. 인식론으로서, 도덕적 법칙에 준거한 정신세계에 관한 지식으로서, 개연성을 가지는 우주에 대한 가설 등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정했다. 이로써 칸트의 원래 목적은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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