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의 통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학문을 아우르는 통일적 체계는 뉴턴에 의한 과학 혁명으로 자연과학이 분리되면서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자연과학의 커다란 변혁은 사회과학에서의 변화를 가속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르네상스 이후 이성과 경험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한 근대철학은 비판철학이 모두를 포섭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비판철학은 인식의 주체 또한 바꿔버림으로 철학 혁명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이성을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나 경험을 발판으로 경험주의, 이를 통합한 비판철학의 사유는 모두 정적인 관점에서의 인식론이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거나, 경험만으로 지식의 창출이 가능하거나 아니면 경험이 지식을 창출하지만,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형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거나 모두 정적 관점에서의 인식론이다. 인식을 균질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보듯이 동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통하여서만 통일성이 확립되는 기반이 마련된다. 통일성의 관점에서 인식을 풀어내려면 우선 정적인 것을 넘어 동적인 관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인식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한 개인이 아이였을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인식 정도 또한 다를 것이다. 더 나아가 인식은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다를 수 있다. 정적인 사유의 인식은 그러한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체, 사회, 국가 등 모두를 고려하여 무시대적, 무공간적 균질성을 해체하지 않으면 모두를 아우르는 통일은 가능하지 않다.
통일의 관점에서 칸트 철학은 해결되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분법은 무언가 불완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관과 객관, 오성과 감성, 사유와 존재 등 모든 대상을 이분적 요소로 세계를 응시하여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분열을 자초했다. 특히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만장일치로 수긍하지 않았다. 물 자체 개념은 이성이 현실에 대해 객관적 지배력이 없다는 원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 불멸성과 신과 같은 이념들을 어떻게 정당화할지도 의문이었다. 이러한 분열적 요소는 자연스럽게 자연과학, 윤리학, 미학의 원리에 공통적인 기초가 없도록 유도되어 진선미도 전체가 아닌 세 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여 상실된 통일성과 전체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헤겔의 사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이래 사회과학의 통합은 헤겔에 의해 이루어졌다.
헤겔은 통일의 원리를 이성 관념에서 찾아 존재 영역을 모두 포용하는 이성의 관념에 포섭시켜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고로 세계의 모든 것들, 유기, 무기, 사회, 자연이 모두 정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헤겔은 그가 살던 당시의 세계를 인간 자유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단계의 시대로 역사를 구분하여 시대성을 자신의 철학에 반영하여 변화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변화의 방법론은 변증법이다. 자유는 이성의 실재를 전제로 하므로 통합적인 합리적 의지와 의식이 세계를 지배하여야만 자유로운 상태가 되고 모든 가능성이 열린다. 역사는 가능성이 달성되는 상태로 가는 것이고 이를 논리학에서 자연철학, 자연철학에서 정신 철학으로의 이행으로 이해한다. 자연법칙 위에 정신 법칙이 존재하며 자연이 맹목적인 필연성에 의해 성취된다면 정신은 자유로 성취된다. 성취가 바로 진리로서 현실의 상태이다.
헤겔에게 개인과 역사와 국가는 오직 이성의 활동이 중요하다. 그의 철학에 이성이 전제되지 않은 곳이 없다. 역사도 오로지 이성만을 문제 삼고, 국가는 이성의 실현으로 간주하였다. 고로 헤겔 철학은 관념적 이성으로부터 도출된 자유, 주체, 정신과 개념으로 구성된 구조물이다. 이들 서로 간의 연관성을 해명하여 자유롭고 합리적 삶의 질서를 얻기 위한 실제적인 가이드를 헤겔은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관념이 빠지기 쉬운 그저 모호한 형이상학이 절대로 아니다.
이성은 자신의 세계에 복종하지 않아 현존의 사태에 반하는 부정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실현한다. 이전의 비이성적인 현실은 이성에 합치될 때까지 끝없이 변혁되어야 하므로 인간 사유가 현실을 지배해야 한다. 사유가 현실을 지배하기 위해서 넘어서야 할 난관이 있다. 개인의 사유는 모두 제각각이어서 개인 의견은 어떤 공동생활 영위를 위한 지도 원리를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 여하 간에 보편성을 띤 사유의 개념과 원리를 가지지 않으면 사유는 현실을 지배하지 못한다. 보편적 개념과 원리의 총체가 이성이다.
이성이 현실을 지배하기 위해서 현실 자체가 합리적으로 되어야 한다. 합리성은 주체가 자연과 역사에 침투하므로 실현되고 주체의 실현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체란 인식론적 자아 또는 의식이란 의미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자기 발전적인 통일체의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모순을 전개하며 발전하는 변증법적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의 실현은 자기실현의 능력을 지닌 인간만이 가능하여 인간 존재 자체가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이고 이성의 개념으로 삶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현실적으로 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존재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헤겔은 못 박았다.
이성은 개개인을 넘어 인간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나타난다. 이성은 본질에서 역사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실현은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발생하고 이러한 과정은 인류의 전 역사에 적용된다. 역사는 그저 어떤 사건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발전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세계이다. 투쟁의 선봉에 역사에서 이성에 해당하는 정신(Geist)이 있다. 여러 시대로 구분되는 인류 역사는 단계마다 다른 발전의 수준을 보이며 이는 이성 실현의 단계와 같다.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직 하나의 이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세계의 역사가 이를 지향해 왔고 사건과 상황의 연쇄 속에서 이를 실현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헤겔이 통일적 사상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칸트 이후 철학의 풍조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 당시 대륙의 사회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의 체계는 비판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구성되었고 구성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