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알록달록
단짝 친구와 한동안 조금씩 용돈을 모으던 때가 있었다. 이름도 쌍둥이처럼 비슷해 우린 운명이라며 언제나 붙어 다녔던 그 친구와 어느 날 같은 목표가 하나 생겼다. 목표 달성을 위해 불타는 의지로 100원 500원씩 차곡차곡 모아 나갔다. 당시 한국에 베스킨라빈스가 들어왔는데, 중학생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지금도 고가지만 그 당시의 중학생에겐 선뜻 손이 안 가는 가격이었다. 어쩌다 한번 먹게 되면 식욕 왕성하던 10대 소녀들에겐 성이 차지 않아 '아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한 번만 원 없이 먹어 보면 좋겠다'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친구와 떡볶이를 먹다가 의기투합하였다. 베스킨라빈스 큰 통을 사 먹을 만큼 돈이 모일 동안 간식도 먹지 말고 차비도 쓰지 말고 계속 모아보자고. 지금 보니 그렇게 까지 해야 했나 싶지만 그때는 큰 소원 중의 하나였기에 서로 얼마가 모였는지 확인해 가며 기대감을 키웠다.
뜨거운 한여름의 어느 날 목표치의 금액이 모이자 하굣길에 두 손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생이 쉽게 사 먹을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소중히 모아 온 거금을 벌벌 떨며 몽땅 주고 호방하게 주문을 넣었다. 파인트 통에 각자 먹고 싶은 맛으로 한 가지씩만 고르고 꾹꾹 눌러 담아 들고 나왔다.
그 친구와는 종종 가던 비밀 장소가 있었는데, 그게 그리 낭만 있는 곳은 아니다. 동네 상가의 2층에는 증권사가 있었는데, 그곳은 특이하게도 그 증권사만 사용하는 단독 계단이 따로 있었다. 낮시간의 그곳은 사람의 왕래가 없어 우리는 종종 그 증권사 계단의 중턱에 앉아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며 우정을 나눴다. 겨울엔 바람을 막아주니 좋고 여름엔 건물 특유의 서늘한 기운에 금세 땀이 식었다. 계단은 지그재그 형식으로 되어있어 처음 코너를 돌아 다시 위쪽으로 연결된 부분까지만 올라가면, 1층에 왕래하는 사람들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아 요새 같은 곳이었다. 간혹 증권사 문이 열리고 오고 가는 어른들이 있었지만, 계단에 쪼그려 앉은 여중생에게 불편한 기색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니 우리가 잠깐씩 들리던 시간엔 일단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거기만큼 아늑한 아지트도 없었다.
그날도 역시 당연히 그 계단을 찾아 대충 걸터앉았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벌겋게 달아오른 분홍빛 볼이 유난히 희던 친구의 얼굴색과 대비가 되었다. 걸어오는 동안 종이통 속의 아이스크림은 여름 더위에 꽤 녹아 있어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첫술을 떴다. "안돼. 아까워. 어서어서" 서둘러 녹아가는 주변 부위를 긁어먹고 나니 처음의 기대와는 다르게 금세 물리기 시작한다. 원 없이 먹어 보겠다는 마음과는 달리 왜 이 큰 통을 한 가지 맛으로 채웠을까 의문이 들어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슬슬 의욕이 떨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통씩 손에 쥐고 앉은 행복했던 순간은 잠깐 사이 지나가고 우리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얼마만큼 더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여름이라지만 하루 종일 해 들지 않는 건물의 계단은 서늘함을 품고 있기에 어느새 냉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오들오들 떨며 오기를 부리고 먹다가 아쉽지만 남기기로 하고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던 그 계단. 지금도 여름의 상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상가 특유의 건물에서 나는 냄새와 서늘한 냉기는 여름의 추억이다. 아기자기함도 포근함도 없던 회색 일색의 그 계단은 중2 여학생들의 알록달록하던 일상으로 가득했던 곳이다. 지금도 어느 동네 상가의 구석진 계단에는 소박한 소확행에 꺄르륵 웃으며 우정을 나누는 소녀들이 앉아 있겠지. 그들의 눈부시게 반짝이는 젊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젠 알 것 같다. 왜 어른들이 볼 때마다 그토록 '좋은 때다~'라고 했는지. 정말 참 좋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