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배우면, 기본적인 원리 중 다음과 같은 단어를 듣게 됩니다. 유한한 자원, 한정된 자원.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지를 고민하게 되고, 합리적인 인간들이 최선의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아주아주 많은 인문학적인 요소가 배제된 수요와 공급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필자 스스로가 갖고 있는 최고의 자원은 아무래도 ‘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돈, 재화와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한 양만큼 주어지는 바로 그 시간.
업무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어느 주간에는 매일 저녁이면 혼자 술을 마시며 땡처리닷컴을 즐겨 들어갔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큰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힘은 여행이라고 믿고 있나 봅니다. 이 나라 저 나라 검색할 것도 없이, 최근 등록된 땡처리 리스트를 전부 훑어봅니다. 명확하게 어떤 여행을 찾는지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던 어느 날, “이거다” 싶은 항공권이 올라왔습니다. 2박 4일 세부.
태어나서 필리핀은 딱 한 번 가보았습니다. 가족여행으로 수년 전에 다녀온 보라카이. 아마도 그때가 제 생에 가장 많은 금액이 투자된 숙소에서 하룻밤을 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그전까지 저의 여행의 대부분은 게스트하우스를 기반으로 하였기에. 따스했던 기억이 가득한 그 나라의 다른 도시가 눈에 들어온 순간, 결제를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2박 4일간의 긴박한 여정이었지만, 제가 가진 한정된 자원이 허락하는 최고의 선택지였습니다.
그 즉시 예약한 도시에는 뭐가 있나 알아보다, 참으로 끌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고래상어와 정어리떼. 하지만 숱한 여행지 선택의 성공과 실망을 번갈아 겪은 후로, 어디를 선택해서 가야지만 옳은 것일지에 대해서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한정된 자원인 ‘시간’의 범주에서 최선의 선택하고 싶었고 실패는 되도록이면 최소화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방문한 도시가 기대와 달리 크게 과장되어 알려져 있거나 혹은 과도하게 상업화되었을 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거리가 가까우면 두 곳을 쉬이 다녀올 테지만, 거리상으로 전혀 가깝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일정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투어코스를 참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정표를 보니, 새벽 2시경 비행기로 세부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픽업버스에 태워서 오슬롭 고래상어로 데려가더군요. 그리고는 영화 아바타의 자연경관에 영향을 미친 투말록 폭포를 구경하게 하고, 그 버스 그대로 모알보알에 데려가 정어리떼를 보게 합니다. 그리곤 당일 오후 중으로 세부시티로 복귀하는 극한의 체력 테스트 투어가 있더라고요. 저는 주어진 시간 내에 어떻게 최대한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위에 소개된 코스를 최대한 길게 즐길 수 있는, 모알보알에서의 일 박을 선택하였습니다.
여행 당일, 여차저차 새벽 비행기를 타고 세부시티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였습니다. 배차 간격도 모르는 버스를 50분이나 기다렸을 무렵 다가온 오슬롭행 버스를 타고 3시간 반을 달렸습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오슬롭에 도착하더군요. 예상대로 사람은 많았지만, 혼자서 오지 못하는, 반드시 투어를 통해야만 올 수 있는 코스는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인 즉, 버스에 내리자마자 호객행위를 하는 현지인들과 서로의 니즈에 맞는 밀당을 성공할 뻔뻔함이 있다면 충분히 도움을 받으며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온순한 포유동물의 이빨도 구경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수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래상어와 한참을 수영한 후 오토바이 뒤에 앉은 채로 한 시간 반을 달리는 모험을 참아내자, 모알보알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수영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고, 바람이 살랑이는 저녁 라이브 바에 앉아 사과향 그윽한 맥주도 마시고 아침의 활기찬 정어리떼 수천 마리를 양손으로 지휘도 해보면서 많은 후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고요한, 사랑스러운 바닷가 마을을 고작 하루만 머물고 떠날 생각을 했다니요. 단순히 하루의 말미만을 갖고자 고민한 저의 판단에 아쉬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이 도시를 떠날 때 까지도 “이게 맞나”, “세부시티를 가면 내가 여기보다 더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갈팡질팡의 과정이 수도 없이 이뤄졌습니다.
사실 여행지를 이곳저곳 다녀보다 보면, 내 맘에 딱 들었다! 싶은 여행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A 혹은 B라는 요소가 있다면 무조건 만족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선택에 있어 참고는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 끝에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했다는 핑계로 빠른 시간 내 도시를 옮겨버리는 섣부른 결정을 하기도 하죠.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모알보알이라는 도시를 잘 모르지만, 행여나 실망하는 마음이 크면 어떠지라는 걱정이 앞서, 딱 하루만 머물러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잠시 스쳐 지나간 그 도시에 대한 진한 아쉬움은 오롯이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의 과정에서 만족하고 실망함을 반복하는 과정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결론을 내렸다한들, 만족도 불만족도 모두 결국에는 아쉬움으로 귀결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여행지라면 더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려다, 정작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 더욱이 그 반대라면, 이 시간에 다른 여행지를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실제로 모알보알에서는 이 조그마한 도시를 더욱 알차게 즐겨보고자 하는 욕심에, 만족스러운 도시임에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우려고 하다 제대로 담아보지 못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쓰고 나니, 결국 우리는 여행지에 대한 어떠한 선택을 하던 필연적으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찰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번 이렇게 받아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만일 우리가 “더” 알아보는 행위를 하는, 즉 비교할 대상을 찾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장의 눈앞에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 보다 집중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한다면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본 것은 곧 우리가 여행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면서 다녀온 도시의 진면목 전부를 보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는 단지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여행지에서 우리가 직접 마주한 것들로만 만족을 찾으려면,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손쉽게 실천해 볼 수 있는 태도의 전환은 어떨까요? 여행의 과정은 사실 계획대로 되지 않음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만족 요인의 비교 대상을 찾지 않는 게 어려우니 특정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스스로의 기대와 실제로 맞닥뜨릴 현실의 괴리를 좁혀보는 겁니다. 여행을 가기 전, “그곳에 도착하면 이런 환경이 펼쳐질 거야” 혹은 “나는 이런 기분으로 여행을 즐기게 될 것이야 “라는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보다는, “아 역시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이것 또한 재밌는데?”
실제로 여행을 떠나다 보면, 물론 계획대로 이뤄져서 즐거운 순간들도 있지만 오히려 크나큰 재미와 이를 뛰어넘는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험들은 모두 계획 밖에서 이뤄졌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계획 밖의 경험들이 더욱더 많은 인생의 고민들을 함께하고 성장하게끔 이끌어줬고요. 지금 생각나는 몇 가지 경험들은 다음과 같네요. 첫 동남아 여행에서 피피섬을 들어가는 배편과 택시 티켓을 사기당해 빠른 포기를 결정해야만 했던 경험. 미얀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중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어느 아저씨가 20여분 함께 달려 길을 안내해 줬던 따뜻한 사람에 대한 경험. 혼자 밥을 먹던 여행자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며 그들의 저녁 회식자리에 초대해 주어 아직도 소식을 전하는 친구가 된 방콕의 경험.
그러니 앞으로의 여행은 조금 덜 비교하고 덜 확신하면서 사건이 이뤄지는 현재의 바로 그 시점에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 다양한 사건들에 내몰리며 현실에서는 쉬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는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행을 끝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은 아쉽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는 생각을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번 여행에서도 한정된 자원이라는 한계를 마주하겠지만, 인문학적 요소들이 무자비하게 배제된 그 단어의 한계에 저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려는 결심을 떠올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