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한 배웅

by 홈나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품에 안겨 한참을 목놓아 울던 사람과 헤어졌다. 나를 웃게 만드는 게 당신의 유일한 행복이라던 사람과 이별을 약속했다. 잠에 잘 들지 못하지만,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잠이 쏟아진다는 사람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둑한 구멍이 생겼다.


언젠가 경험해 본 적 있는 이별의 아픔, 그쯤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다시는 해를 볼 수 없는 지독한 어둠에 갇힌 듯 서서히 그리고 자주 아팠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주말의 즐거움이, 하루의 끝에 느끼던 달콤한 행복감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당신이 있기에 빛이 났던 나의 일상은 생기를 잃었다.


마지막을 고하며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주는 사랑의 크기에 비해 나의 사랑의 크기는 작았으며, 나 스스로를 내려놓지 못한 채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기에 당신이 힘에 부친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놓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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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래전부터 함께하기로 한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어야 했다. 헤어짐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목적지를 고민하고 여행을 떠나야 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를지라도 이별의 슬픔은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고 믿었다. 쓰여진 수많은 우리의 문장들 위로 다시 한번 복기하듯 새로운 펜으로 꾹꾹 눌러쓰며 덮어 씌워야 한다. 함께했었을 그곳으로 혼자 떠나는 고통은 너무나도 크지만, 당신을 나에게서 덜어내기 위해 새로운 경험들로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눌러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산티아고로 떠났다.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내 마음의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걷고 싶었다. 이른 아침 알베르게를 나서면 아직 해를 내비치지 못한 밤하늘 도화지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길을 안내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붉고 커다랗던 달빛은 내가 앞을 보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발이 아파 힘에 부칠 때면 ‘부엔 까미노’라는 순례자들의 인사말이 위로가 되었으며, 중간중간 마을에서 마주한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곤 계속해서 되뇌었다. 당신이 울며 잠들었을 많은 날들. 나를 놓으려 결심하던 바로 그 찰나. 당신에게 새겨졌던 나의 의미. 그에 반해 욕심 가득히 짊어져 나를 힘들게 만드는 내 배낭의 무게.


그렇지만 당신의 말과 달리 길 위에서 내가 깨달은 점이 있다면 바로 이 것이다. 당신을 향하던 지난날의 나의 사랑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당신이 일을 하다 밤늦게 귀가할 때면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에게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은 사랑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먹고 싶다던 음식을 어떻게든 레시피를 알아보며 만든 요리는 사랑이었고, 힘든 상황들로 슬퍼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기다리는 나의 인내도 사랑이었다. 그저 우리의 사랑이 달랐을 뿐이다. 당신과 나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 사랑을 인식하는 방법이 달랐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에 있어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산티아고 길 위에서 비로소야,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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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매번 소형 승용차가 왔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멋들어진 양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벤츠의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셨다. 이 도시가 나에게 보여주는 정중한 배웅은,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또 마음이 나아지면 다시 오라는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언제든 반겨줄 수 있으니.


같지만 또 다른 새로움으로 가득했던 이 여행에서 나는 당신과의 문장들을 다시금 아로새겼다. 같은 문장 위를 새로운 펜을 들고 꾹꾹 눌러 덮어씌웠다. 그렇게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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