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A에 대해 이렇게 무언가 얘기할 수 있을만큼 A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나로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A의 독특한 사고방식 덕분이다.
A는 내가 살던 아파트와 학교 사이를 잇는 800m가량의 오르막길 바로 앞에 있는 세차장. 옆에 있는 주거 시설로 허가 받았는지 의심스러운 어딘가 어설프게 지어진 집에 살았다. 그 덕에 나는 매번 등교할 때마다 A의 집을 지나쳤지만 그 날 전까지 A와 나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아마 A는 할머니와 사는 것 같았고, 말할 것도 없이 가난해 보였다. 일진들과 어울려 다녔고, 그 사이에서도 꽤 큰 발언권을 가진듯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다녔던 학교의 일진들이 소문만큼 악랄했을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조폭과 연루됐다는 소문, 칼을 써서 입원 시켰다는 소문, 잘못 엮였다가는 고등학생 형들까지 몰려와 다구리를 놓는다는 소문 같은 것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고, 나는 그 소문의 주인공이던 일진들이 내 쪽으로 다가올 때는 심장이 쪼그라들고 심지어는 다리고 후들거리는 기분마저 들곤 했었다.
그런 이유로 A와는 같은 반이었음에도 제대로 이야기 하는 일 없이 1년을 보냈고, 그게 당연하게 생각됐다.
그렇게 1년 쯤이 지나고 내가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내리막길 앞 세차장을 지나고 있었던 때, 뒤에서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A였다. 아마 술을 조금 마신 것 같았다. A가 아무리 독특한 성정을 가졌어도 맨정신에 그렇게 나를 불러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A가 권하는대로 세차장 앞 마루에 그녀와 같이 앉았다.
"어디 가? 이 시간에?"
"그냥 집 가는 거지."
"뭐하다가?"
"학원."
"니가 공부 잘했었나?"
"그냥...뭐."
"나는 일 가."
"무슨 일? 주유소?"
그 당시 근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학생을 고용해 주기로 유명한 주유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주변의 알바하는 중학생들은 대부분 그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니. 빠구리."
"그게 일이라고?"
나는 대답하면서 A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이 정확히 안나지만, A를 보며 내 귀에 대고 '쟤 진짜 걸레래' 같은 이야기를 했던 누군가가 있었던 생각이 났다.
"왜?"
갑자기 A가 정색을 하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눈빛을 보니 여기서 성인군자인척을 했다가는 다음 날 일진들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쿨해보일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얼마 벌어?"
A는 대답 대신 지갑을 꺼내 보였다. 아마 구찌 로고가 박힌 비싼 것이었을테지만 내 눈에는 그냥 아줌마 지갑 같아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그후로 십 수 년간 이어진 수입 이상을 명품 소비에 쏟아 붓는 습관의 시발점을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보면 이해가 간다. 결국 그렇게라도 즐거워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수 백 만원을 들여서 단 한 순간 즐거울 뿐이더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결국 즐거움이라는 것은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얻어야 한다. 이 치사한 사회는 온갖 즐거움을 다 금지해놓았지만 사람들이 권태에 질식해 죽지 않도록,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고도화하는 행태는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태에 질식해 죽지 않기 위한- 복잡한 즐거움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거의 필수라고 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적어도 거의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A에게는 누가 그 즐거움의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었을까. 미디어가 그 공백을 파고 들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함, 소비, 피상성을 부추기는 미디어. 화려한 가방을 매서 주목을 받는 것이 니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듯한... 하지만 그런 소비 위주의 즐거움은 소비의 기반을 조명하지 않는 반쪽짜리 비현실적인 일상임은 둘째치더라도, 설령 소비력이 뒷받침 되더라도 깊이가 없어 권태를 오랫동안 막아줄 수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부모와 대화도 못해보고 일상에서 보고 배울 사람조차 없는 A가 완전한 도화지 같은 상태로 미디어의 -결국은 유해해져버린- 소비철학에 노출되어 버린 것을...
A의 일탈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없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했으니까. 그 일을 하기 전, A가 한 달에 한 번쯤은 치킨을 먹을 수 있는 사정이 됐는지도 의심스럽다. 사회는 온갖 즐거움을 금지시켰고, 그 대신 고도화된 즐거움의 길을 열어놓았으며 소비의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소비력도 없고 방향을 잡아줄 사람도 없는 A에게 사회는 모든 걸 금지하고 말라 죽는 길만 열어놓는 정신나간 폭군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얼마 전 A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는 의사였는데 직접 만나보니 동태 같은 눈으로 나를 경계하듯이 쳐다보며 천박한 이야기를 웃음기도 없이 꺼내는 것이 만남 후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사라는 직업, 그리고 아마 거기에 따라올 돈을 제외하고 매력을 찾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과 결혼하는 것을 보면, A는 여전히 소비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권태를 견디며 살아가나보다. 그녀의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다. 의사 남편의 돈으로 한층 커진 손. 그 손으로 그동안 못 사 봤던 에르메스를 살까? 아니면 유럽 여행을 갈까? 아마도 에르메스겠지... A가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남편은 그녀를 멈출 수 있을만한 사람일까? 아니면 그녀의 하루치 즐거움을 위해 부모님과 친구를 속이게 될까? A와 남편 모두를 위해 전자이길 바란다. 하지만 의사 양반은 A보다 더 즐겁지 않아 보인다. A를 위한 즐거움의 청사진을 제공할 능력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럼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소비에는 끝이 없지만 모아둔 재산에는 끝이 있는데. 이혼하지 않을까? 이혼 쯤이야 A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한 번 밖에 본 적 없는 A의 예비 남편이 더 걱정스럽다. 돈 한 푼 없이 이혼까지 당하고서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A의 남편은 생각보다 강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비의 권태기와 새로운 취미가 맞물려 A에게 전혀 다른 방식의 생활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흔히 아이가 생기면 다르다고 하니까, 출산이 인생그래프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30년을 한 방향으로만 가던 무언가의 방향을 돌려 놓는 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15년 전 그날 밤 내가 어설픈 성인군자 연기를 해서라도 그녀의 안타까운 습관의 싹을 잘라 놓았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