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살던 당시의 아테네의 배심원 재판은 500명의 배심원이 투표를 해 더 많은 득표를 얻은 쪽으로 판결을 내리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률의 해석보다 배심원들의 판결이 중요했던 재판인 만큼 당시 재판에서는 감정에 호소하고, 배심원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재판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최대한 동정을 사기 위해서, 자기의 아이들과 그 밖의 친척들 그리고 많은 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재판관들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탄원하고 (…) 무엇이나 되는 듯이 여겨지던 사람들이, 재판을 받게 될 때에는 대경실색할 짓들을 하는 그런 몇몇사람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을 때 동정에 호소하지도, 재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꾸며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은 형벌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영빈관에서 식사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해왔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결국 배심원의 반감을 산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판결이 사형으로 확정된 이후 감옥에 수감된 소크라테스에게 친구 크리톤이 찾아옵니다. 크리톤은 이미 간수와 통하고 아테네 밖으로 가 생활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으니 함께 나가자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내면의 소리가 그것을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독배를 들이켜 생을 마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모면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넘어선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동기로 흔히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부각됩니다. 당시의 아테네에서는 부당한 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민을 갈 권리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시민으로서 산다는 것은 법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닌가? 아테네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며 살았으면서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 아닌가?" 결국 소크라테스는 법을 어기고 탈옥하는 것을 내면의 목소리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단한 점은 악법이 법이라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권위주의적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의 일본에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한다.”는 메세지를 강조해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는 비록 여성과 노예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지만 세금을 내는 남자 시민들에게는 지금의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아테네의 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이민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반면 20세기의 식민지배 당시 피지배 국가의 국민들이 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만약 탈옥을 해 이민을 간다면 이민을 간 국가에서는 “너는 이미 아테네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려놓고 너에게 불리할 때가 되니 법을 어기고 도망을 갔구나. 여기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있는가?”하고 말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한 것이 아닌 법을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감과 이후의 사회적 시선 역시 고려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대단한 점은 법에 대한 순종이 아닌, 목숨을 잃더라도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려는 절대적인 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로 하고 헬스장을 끊은지 3일 만에 집에 오자마자 누워서 헬스장을 안 갈 때,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우스워보이고 싶지 않아서 사실이 아닌걸 알면서도 나를 부풀려서 말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이게 아닌데..”와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소크라테스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무엇보다 사소한 일이라도 내면의 목소리가 반대하는 일은 절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기도 하지만, 자주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헬스장에 가는 대신 누워서 유튜브를 보거나, 뻔히 거짓말 인걸 알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때 당장은 편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면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들고, 내가 작아진 듯한 기분이 들게 됩니다.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은 그러한 타협에 대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금 막, 자기 따귀를 때렸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는 모른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감은 똑똑히 알고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것은 “내면의 목소리를 절대적으로 따른다면,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할수록 우리는 작아지고 옳은 선택을 하기 힘들어집니다. 반대로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해 작은 비양심적인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순간에서도 나를 지키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