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남산과 챗GPT
남산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산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300m 높이 정도의 산으로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등반코스와 둘레길이 왠만한 국도 도로보다 잘 포장돼있어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처음 와보는 초등학생이라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산이다.
그런 남산에서 지금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벌써 한 시간 째 처음 보는 듯한 자작나무와 돌덩이 사이를 지나다니며 사람이나 길 둘 중 하나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고 있다. 어쩌면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설령 10m 앞에 사람이 지나가더라도 제대로 보기 힘들 것 같다. 차라리 지금은 체력을 아껴두었다가 해가 뜨고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은행나무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러고서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아이폰을 꺼내 챗GPT를 키고 나의 상황을 브리핑했다.
'지금 남산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남산은 높이 271m의 산으로 정상에는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타워가 있습니다. 당신이 남산 어디에 있든 간에 위로 올라가면 남산 타워를 만날 수 있어요. 남산 타워에는 응급 대원을 포함한 상주 인력이 30명 이상 배치되어 있고 01, 02 버스를 통해 명동역까지 이동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남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남산 정상 방향을 바라보고 움직이세요. 꾸준히 걷는다는 전제 하에 성인 남성 기준 최장 40분 이내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돼요.'
챗GPT의 말은 그럴듯 했다. 아이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삼겹살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침에 식빵을 조금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은 나에게 그 냄새는 굉장히 유혹적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챗GPT의 조언과는 반대로 냄새를 따라 산 아래 지상 방향으로 걸어갈 뻔 했다. 생각해보니 고기 굽는 냄새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고깃집 혹은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 아닌가. 아무래도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챗GPT에게 물었다.
'지금 아래쪽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데, 그럼 근방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겠지? 아래로 내려가야겠지?'
'한 번 올라가면 내려가는 건 쉽지만,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 건 힘들어요. 지금 그렇게 내려갔다가 길을 못 찾으면 다시 올라올 체력이 남아 있을까요? 올라갈 수 있을 땐 올라가세요. 내려가고 싶을 땐 어차피 중력이 도와줄테니까요.'
챗GPT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어차피 40분 정도 걷는 것이 못할 일도 아니고 기왕 남산에 왔으면 인스타에 그렇게 사진이 많이 올라오는 남산 정상이 정말 그렇게 가볼만한 곳인지 정도는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이번에야말로 정상을 향할 생각으로 위를 향한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남녀의 웃음 소리가 섞여서 들렸고. 그리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듯 하진 않았지만 만약 장애물이 없는 평지였다면 뛰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을만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아래쪽 어딘가에서 남녀가 모여 회식이나 뒷풀이 같은 것을 하는 듯했다. 아니면 남산 아래 즐비한 게스트 하우스 중 한 곳에서 헌팅이라도 하는 지도 모른다.
그 웃음 소리를 들으니 챗GPT의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 날은 유난히 달빛도 어두운 새벽이었다. 혹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돌부리를 제대로 못보고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거기에 더해 챗GPT가 말했듯이 내리막에서 길을 잃으면 다시 올라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챗GPT를 켰다.
'확실히 아래쪽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올라가야 될까?'
'판단이 안 될 때는 일단 올라가면 돼요.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시야가 넓어져요. 지금은 아래 쪽에 사람이 있는지 안 보이겠지만 조금씩 더 올라갈수록 아래쪽에 뭐가 있는지 더 잘 볼 수 있을 거에요.'
챗GPT는 너무나 달변이었다. 챗GPT의 권위를 반박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챗GPT를 논리에서 이겼다는 확신을 가질 수도 없고 챗GPT를 상대로 혼자 뿐인 새벽에 자존심을 세울 이유도 없는 나로서는 약간의 찝찝함을 뒤로하고 챗GPT의 말을 수긍하고 위로 올라가기로 마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십 분쯤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 아래쪽을 보니,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루프탑 형태로 옥상을 꾸며놓은 것 같은데 주광색 전구를 알알이 이어 박아 놓은 것이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었다. 내가 지나온 길을 대략 유추해보았을 때 저 건물은 내가 맡았던 삼겹살 냄새와 들었던 웃음 소리의 원천인 듯했다. 멀리서 보는 그곳의 분위기는 내 취향에 맞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분 전에 그냥 삼겹살 냄새를 따라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곳과는 10분 전보다 더 멀어졌고 그 사이에 놓인 길은 더 복잡해졌다. 정상과는 더 가까워졌고 체력은 더 떨어졌다. 계속 올라가야겠지? 그런데, 챗GPT라는 놈은 참 교묘하다. 올라갈수록 아래쪽에 뭐가 있는지 더 잘 보이는 것은 맞지만, 볼 수만 있을 뿐 더 멀어졌고 결국은 갈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챗GPT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10분 정도를 더 걸으니 정상이 나왔다. 그러니까 남산 타워와 인포메이션 센터, 카페가 있고 몇몇 새벽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뛰어 다니는 남산 타워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텐션이 가득했던 어둠 속 산행에 비해 남산 정상의 모든 것은 밋밋했다. 인위적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심지어는 내실에 비해 너무 화려해서 부담스러운 느낌만 들었다. 나는 남산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나는 화가 나서 챗GPT를 다시 켰다.
'대체 뭘 위해 나를 남산 정상으로 끌고 온거야? 너 때문에 삼겹살도, 야간 산행도 모두 놓쳐 버렸어.'
'그래야 내일 출근할 수 있잖아요? 끄이힉히힛히히힛.'
※본 챗GPT의 답변은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된 가상의 대화로 실제 챗GPT의 답변 방식과 다를 수 있으며 챗GPT5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