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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Nov 02. 2023

원주민 다큐멘터리를 보고

원주민들에겐 예수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원주민들의 마을에 예수가 태어나도 평범하게 살 것 같다.


사회라고 할만한 것이 생겨야 사상과 종교도 필요해지는 것 같다.




공자는 조직된 군대가 전쟁을 하고. 세분화된 계급 속에서 정치가 생기고 사유 재산이 욕망을 자극할 만큼 자리잡은 시대에 나온 사람이다.


그 전에는 공자가 필요가 없었을 거다. 권모술수로 분열된 삶을 사는 사람도, 돈에 눈이 먼 사람도, 사회의 요구와 본성간의 충돌도 거의 없었을 테니까.


공자는 불필요한 혼란을 정리했다.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진 사회에 발맞춰 사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런 것이 필요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대해진 사회에 걸맞는 삶의 방식을 못 찾고 있었으니까. 사회는 사유재산과 빈부격차를 만들었지만 그것에 발들이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가르쳐주고 가족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다. 학교가 가르쳐주고 국가라는 틀 안에서 책임도 자유도 제한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시작되는 존중과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이카루스처럼 추락하기 십상이다. 명성과 재산 등을 두고 거짓이 오고가기 시작하면 아무 얻을 것 없는 소모전이 시작된다.


그래서 공자가 나타나 인의예지충효를 외치며 도에 따라 가난도 무명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공자는 사람들이 사회에 좀 더 잘 적응해서 고통을 덜 겪도록 했다.


하지만 인의예지충효를 달달 외우며 사회에는 잘 적응했는데 고통받는 사람들은 공자에게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시대의 흐름을 한 발 빠르게 캐치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시대의 흐름을 좀 더 잘 읽은 사람들로 하자. 노자는 그냥 혼자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의예지충효에 지친 사람들의 그 이상의 이상ideal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노자가 나온 것이다.


아무튼 노자는 인위적인 규범에 지친 사람들에게 무위를 제시했다. 그것은 공자 이전 사람들의 무위와 다르다. 공자의 가치를 내재화한 사람들의 무위다.


문명화되기 이전 사람들에게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이 당연했다. 하지만 거대 문명의 구성원으로서 무위자연적 삶은 부적응을 초래했다. 법이 생겼고 군대가 생겼고 강제성이 생겼다. 외부환경이 유위를 강요하는데 그 안에 살면서 계속 무위를 추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공자가 이상적인 유위의 원칙을 내세웠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거대한 사회, 법, 공자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했다. 그럼 이제 공자를 버릴 때가 된 것이다. 공자와 세상이. 공자와 내 마음이 맞닿는 부분은 내재화되었으니. 공자의 말씀이라며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들은 버려버릴 때가 된 것이다. 다시 예전의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위를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본다면, 이전의 무의식이 본능적으로 사는 법만을 알았다면 새로운 무의식에는 법과 공자를 참고해 문명사회에서 사는법이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종교가된 공자가 남긴 찌꺼기들 뿐이다.


그러니 장자는 말한다.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쉽게 쉽게 살아라.


공자와 장자의 말은 지금도 똑같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와 지금은 분명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세상이 안정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 같다.


변화한 현대 사회에 건전하게 적응할 수 있을 만한 행동양식, 마음가짐, 계율. 법적이고 피상적인 것 이상의 깊이를 가진 것.


그리고 그것에 적응한 사람들을 다시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돌려줄만한 현대 사회에 걸맞는 방식의 무언가.


정신분석학으로 따지면 아들러는 전자에 특화되어 있고 칼 융은 필요한 경우 후자의 접근방식도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공자 노자 예수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파급력이 작다. 공자 노자 예수는 벌써 이천년전의 이야기이고 현대 사회는 꽤 많은 부분이 달라진 듯하다.


새 시대의 공자맹자와 노자장자가 필요하다. 모세와 예수가 필요하다.


필요하다기 보다 있으면 좋다? 정도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이미 나왔거나 나올락말락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을 테니까. 어차피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장자 부처 예수를 직접 들여다보고 혹은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융처럼 나름의 체계로 정리한 사람을 통해서도. 그 외에도 내적인 이해 또는 세상과 자기에 대한 이해를 개인적으로 넓힐 수 있는 유효한 방법들이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가장 새로운 것에 대한 포용력이 높아지는 시기는 전쟁 같은 재난이 가까울 때 같다. 공자 노자는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나왔고 정신분석학이 이정도로 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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