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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Nov 04. 2023

오쇼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쇼 라즈니쉬는 인도 출신의 사상가이자 구루다. 종교 지도자나 작가, 사업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부처, 노자, 장자,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고전에 대해 강의했다.  '그런 사람이 한 둘이야?' 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소화했다는 느낌을 주는 건 한 둘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다.


동시에, 수 만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미국의 도시 하나를 라즈니쉬 타운으로 만들어버렸다. 보통의 사상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행동력이다.


물론, 프리섹스 공동체로 미풍양속을 망친다거나 라즈니쉬 타운은 5년을 못채우고 무너진 한여름밤의 꿈이라는 등 비판은 많지만 어쨌든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흔치 않은 성과를 낸 건 맞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인상 깊었던 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자신의 가장 가까운 비서였던 쉴라와의 갈등이다.


쉴라는 라즈니쉬 타운을 만들고 운영하며 라즈니쉬와 가장 가깝게 소통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라즈니쉬가 새로운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며 쉴라의 입지가 줄어들고,


라즈니쉬 타운이 주변 일반 시민과 미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며 입지가 불안해지는 등의 상황에서


쉴라는 라즈니쉬 몰래 비행기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라즈니쉬를 '사람들의 피를 빨아 롤스로이스를 사는 기생충' '나를 죽이려고 킬러를 고용할 수도 있는 사람' 등이라며 비난한다.


쉴라는 그러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당시 나이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애초에 비즈니스적으로는 능력이 있을지 몰라도 사상적 깊이는 없었다. CC를 하다가 깨진 여자가 학교에서 전 남자친구를 욕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조금 어이 없던 부분은 라즈니쉬도 CC하다가 깨진 대학생 같은 모습으로 대응을 했다는 것이다. 쉴라가 도망친 걸 알고 나서 라즈니쉬는 쉴라의 온갖 범죄 혐의를 들먹인다. 자신을 도청했으며, 자신의 주치의를 살해하려고 했고, 거액의 돈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헤어진 시점에 화가 나서 치부를 들추어 댄다는 점에서 그의 모습은 구루보다는 길바닥에서 싸우는 젊은 커플 같은 모습에 더 가까웠다.


이어서 그는 '쉴라는 항상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했는데, 내가 비서와는 섹스하지 않겠다고 거리를 뒀다. 그 질투심 때문에 그녀는 저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말도 했는데. 이 역시 예수와 부처 사상의 정수를 이야기하면서 평온하고 환희에 찬 삶을 이야기하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남녀관계라는 건 예수와 부처를 달달 외고 삶의 철학을 말하는 50대 구루라도 흔들만한 그런 거구나. 싶다. 아마 공자였다면 절대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을 거다. '역시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고 한 마디를 하고 혼자 삭히고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부처는 애초에 누군가와 그 정도의 감정적 유대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 만약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도 평온함을 유지할 것 같다.


라즈니쉬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라즈니쉬는 애초에 화를 내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분노가 마음에 생기면 억누르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분노를 살라고 말을 했다. 또 현자?는 외적인 상황에 따라 화를 낼 수도 있고 헛짓거리를 할 수도 있지만 바퀴의 중심은 가만히 있듯이 내면의 평온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그 말들에 따라 보면 라즈니쉬는 평소 자신의 말과 크게 모순된  모습을 보인 건 아닌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홍대에서 싸우는 이십대 커플처럼 추잡하게 싸우는 건 좀 우습긴 하다. 깨달음에 명확한 선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말로는 가장 깊은 깨달음을 표현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 라즈니쉬인데.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어도 여전히 저렇게 사는 거구나 싶기도 하다.


13세기 선종 스님 지눌은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단박에 깨닫고 점점 수행해간다는 뜻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단박에 깨달아 더는 수행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내 생각엔 지눌은 깨달음을 너무 신격화하고 아무도 이룰 수 없는 신성한 경지처럼 보이는 것을 경계해 돈오점수를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을 이룬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깨달음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거나 죽기 전에나 이뤄야 할 목표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


반면 성철 스님은 너나 나나 깨달았다고 하는 세태를 보고 저딴 건 깨달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돈오돈수를 주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서양의 일부 종교적 시설에서는 이런저런 시키는 일들을 하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명을 해준다고 한다. 그런건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무언가 달라진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성한 것이다. 이런 뜻으로.


나는 점오점수라고 말하고 싶다. 깨달음에는 끝이 없다.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깨달음이라는 이상적인 상태에 점점 가까워져 갈 수 있을 뿐이다. 완벽한 것은 죽은 사람 뿐이다. 돌처럼 아무 감정도 없고 단단한 무엇일 뿐이다. 살아 있는 한은 완벽할 수 없다.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사기꾼이라는 뜻은 아니다. 깨달음의 이론적인 면으로는 큰 줄기가 있는 것 같다. 그걸 이해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평온함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의 입장에선 깨달았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은 완벽한 상태다.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배신했다고, 갑자기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전재산을 날렸다고, 사회의 한복판에서 이런저런 책임이나 요구에 직면한다고 변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평온과 기쁨을 유지하는 상태. 하지만 그런 건 인간적인 게 아니다. 어쩌면 죽은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건지도 모른다.


오쇼 다큐멘터리를 보고 인상 깊었던 두 번째 것은 오쇼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쉴라는 실제로 오쇼를 도청했고, 오쇼의 주치의를 죽이려고 했다.


그녀가 도청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오쇼가 주치의에게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고, 주치의가 모르핀과 심장을 멎게 하는 약물 등을 이용해 죽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치의를 비롯한 오쇼의 주변인물들이 오쇼를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주치의를 죽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주치의나 오쇼의 주변 인물들은 정말로 오쇼의 요구를 들어주려 한 것 뿐이다. 오쇼는 정말 죽고 싶었을 거다. 내가 봐도 그는 어깨가 쓸데없이 무거웠고 세상에 더 이상 원하는 것도, 환상도 없었다. 그냥 죽어서 평온해지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라즈니쉬 타운을 운영하면서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라즈니쉬는 '옛날 불교 스승은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된 제자를 발견하면 몽둥이를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쳐 죽여버렸다고 한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했다고 한다. 죽음의 직전에 제자는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화다. 깨달음은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것. 깨달은 사람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우화. 어쩌면 깨달은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는 우화.


평온하게 죽고 싶었던 라즈니쉬의 마음은 어땠을까? 깨달음을 얻은 제자처럼 죽음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고 싶었을까? 유명세와 따르는 사람들,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재산과 언론의 주목 때문에 무거워진 어깨를 털어낼 수도 없고 그것을 활용해 이상을 이루기엔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도망쳐버리고 싶었을까?


오쇼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눈에 띄는 결함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인데 당연한건가? 아무튼 그의 사상은 깊이가 있다. 그 자신의 사상도 독창적이고 울림이 있지만. 부처와 장자 등의 고전을 자신의 시각으로 맥을 가지고 풀어낸다는 것은 보기 드문 능력이다.  


비록 그는 여자 비서와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자살을 하긴 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대체로 깨달은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다. 기쁨과 환희 속에서 주어진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그리고 설명하는 능력. 특히 고전을 통해서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유언으로 '내 꿈을 너희들에게 남긴다'는 말을 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의 꿈이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쨌든 사람들에게 고통 대신 평온과 환희 기쁨을 주는 무언가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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