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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Feb 15. 2024

종교를 바꿔야 한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게 되어 있다. 잠시간 불행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행복하도록 되어 있다.


모두가 자살충동을 느끼고 섹스를 할 의지도 없이 무기력했다면 생명은 멸종했을거다.


그런데 세상에는 불행이 있다. 필요한 것보다 많이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있다. 비밀도 아니고 선택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어도. 한 발짝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도 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불행이 많아진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본성의 문제도 아니지만 아무튼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종교 비슷한 무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무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웃으면 복이온다는 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웃지 않는 이유는 '그런 가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을 들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권선징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고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도 참는 이유도 무언가 그런 욕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할 수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행복보다 중요한 어떤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뭘까. 그것은 그냥 살아오면서 쌓인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많이 들은 소리. 어릴 때 많이 들은 말.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그냥 반복해서 많이 듣고 해온 것. 


살아오면서 쌓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결국 그런 가치관을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인생을 만든다. 그런 가치관이 행복도 불행도 만들고 부자도 가난도 만들고 성장도 정체도 만든다. 


종교란 것은 그런 가치관의 기준이 되어 주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일 수도 있고 성경 구절일 수도 있고. 불교라면 부처님 말씀일 수도 있고 불경 구절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라는 것은 신이나 다름없다. 기독교인에겐 하나님이 신이고. 종교가 없다는 사람에겐 그냥 살면서 쌓인 것이 신인 것이다. 


가치관에 따라 같은 일이 좋게 느껴질 수도. 안 좋게 느껴질 수도 있고. 비슷하게 살고 있어도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 있을 수도. 불만족하고 있을 수도 있다. 


조금 비약이더라도, 가치관에 따라서 인간은 행복할수도. 원하는 것을 이룰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가치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가치관은 신과 같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냥 살아오면서 쌓인 것에 따라. 혹은 본성적인 것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경험과 본성이 뒤섞인 잡동사니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적 신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신이라는 것은 그 신성성을 배제하고 생각해도 수 많은 현자의 목소리가 담긴 것이고 그런 면에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를 여러모로 뛰어넘은 신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고 불경을 읽으며 설문조사에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쓴다고 종교인이 아니다. 가치관이 하는 일을 종교적 신이 대신하는 것이 종교인이다. 어떤 판단을 하기 전에 알지도 못하는 새 하느님이 먼저 끼어들어야. 부처님이 먼저 끼어들어야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라면 가치관을 바꿀 이유가 없다. 종교를 바꿀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사회의 문제도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의 문제도 다른 누군가의 문제도 아니며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잡동사니 신이 문제인 것이다. 믿던 신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바꿀 의지만 가진다면 그 이후로는 어려울게 전혀 없다. 바꿀 의지를 가지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바꿀 의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믿던 신이 나에게 불행을 주는 어딘가 잘못된 신이라는 것을 아는게 도움이 된다.


진심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내 판단이 맞나?' 


만약 지금 불행하다면 그 판단은 맞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잡동사니 신은 어딘가에서 쓰레기를 모아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기준을. 지금까지 믿어온 신을 버려버리고 나면 앞으로는 그럼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다.


한 번에 가치관을 뒤엎으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잡동사니 신이라도 여러 면에서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되어 왔을 것이다. 


갑자기 내 판단을 다 버리는게 아니라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것에 발을 들여볼 수도 있다. 예전 같으면 안했을 일들을 일단 삼일 정도는 해볼 수도 있다. 예전 같으면 신경도 안썼을 이야기를 일단 끝까지 듣고 관심을 가져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느껴보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좋으면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고 안좋으면 멀리하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그냥 가치관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종교와 신을 들먹인 이유는. 그런 가치관의 확장과 변화의 종착점에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의 신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실체로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동서고금의 현명한 사람들이 신이라고 표현하는 그 무언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부처는 불성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고. 영성적인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곧 신이라고 말하며. 칼 융은 신이라는 표현을 쓸 때 무의식의 어떤 면을 표현하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성경에도 그대가 곧 신이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통상적인 의미로는 모든 것을 관장하고 창조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모두 맞는 말이다. 다만 잡동사니 신은 나의 좁은 시야와 생각에 갇혀 있을 뿐이다. 종교적 신은 표현의 한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아무튼 행복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불행할 뿐이다.


우리의 신은 우리의 좁은 시야와 생각이 사회의 마찬가지로 좁은 시야와 생각과 만든 합작품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를 바꿔야 한다. 나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나의 확신이 바뀌어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행복하다면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불행하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면 바꾸면 된다. 그 잘못됨은 남의 탓처럼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회적 한계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믿음의 문제다. 종교를 바꾸면 된다.


기독교인이 불교인이 되는 게 종교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의 확신을 바꾸는 것이 진정 종교를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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