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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an 31. 2024

즐거운 예수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과장되는 것 같다.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 될 사람들의 불행은 과장되는 것 같다.


함부로 따라했다가는 저런 꼴을 당할 수 있으니 어설픈 마음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대표 격은 예수가 아닐까?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고 고개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본다.


더 없이 위대한 사람. 신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인 사람이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모든 곳에 보여지고 있다. 


그건 좀 이상하다.


아마 예수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냥 기분 좋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즐거웠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요절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자가에 안 못박히고 오래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성경에서 묘사된 예수의 모습을 보자.


예수는 확신에 차 있다. 이 세상을 넘어 완벽한 세상을 보고 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 속에서도 잠시 흔들렸을 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부활한다. 



예수는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처럼 사는 길에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같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예수가 그런 어려움을 미리 알려줬으니 우리는 피해갈 수 있을 수도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십자가만 아는 사람은 반쪽 밖에 모르는 것이다.


예수는 고통스러워하며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살지 않았다. 


즐겁게 살았을 것이다. 


니체도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니체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고 깊은 몰입을 했다.


즐겁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몰입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미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미쳤다면 다만 이해를 넘어선 무언가를 보고 감탄할 때 쓰는 의미로 미쳤을 뿐이다.


니체는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기 때문에 불행이라는 포장으로 덮여져야 했다.


선악의 초월. 그런 것은 히말라야에서 수행하는 스님이나 이 천년 전에 살았던 현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도덕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현실 사회에 함부로 발 들여서는 안 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니체가 합리성을 기반으로 선악의 초월을 말해버린다.


역사와 논거를 기반으로 도덕의 무상함을 말해버린다. 


그런 것은 함부로 권장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뒤틀린 욕망을 선악의 초월로 포장하고. 도덕을 기반으로 합의할 수 없는 사회. 그러니까 개판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니체를 보는 사람들은 생각해야 한다. '아 저런 말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거구나.' 아니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저 모양이구나.'


다만 니체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니체의 말 자체에서 배워서 진정한 선악의 초월을 알면 된다.


그러니 니체는 유명하지만 불행한 사람으로 혹은 정신나간 사람으로 유명해져야 하는 것이다. 



부처 역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섹스를 할만큼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불교적 수행의 과정에서 성적인 금욕이 중요시되는데 갑자기 부처가 섹스파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면 곤란하므로 그런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부처가 섹스를 했건 안했건 부처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부처는 번뇌에서 해탈한 자이고. 수 십년간 자비로서 가르침을 전해온 사람이다. 


다만 수행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부처가 섹스를 했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으니. 부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도 섹스를 했는데 나라고 왜?' 라고 스님이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부처도 춤 출 수 있고. 섹스를 할 수도 있다. 다만 보여지는 부처는 인자한 미소를 띄고 앉아 있을 뿐이다. 




흔히 우리가 문신돼지육수충이라고. 머리 빈 여자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허세나 부리고 화려한 생활의 이면에는 온갖 불행이 있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문신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생명력.


머뭇거리다 청춘을 날려버리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즐거움이 있다. 



부처처럼 번뇌를 버린다고 해서. 불상처럼 눈을 반만 뜨고 가만히 앉아 있을 필요도 없고.


예수처럼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고.


니체처럼 지적인 이해로 먼저 달려나간다고 해서. 불행할 이유도 없고.


문돼처럼 욕망을 따라 활력 넘치게 산다고 해서. 중고차 사기를 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우리는 배울 수도 있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보며 '좋은 의도라도 억지로 실현 하려다 보면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될 수도 있구나. 목숨을 걸만한 좋은 의도만 챙기며 살아야 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문돼를 보며 '욕망에 따라 사는 건 좋지만 현명함을 갖출 필요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불상을 보며 '번뇌가 없는 사람은 저런 모습이구나. 저 모습을 떠올리며 명상을 해보자' 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니체를 보며 '좀 더 현명하게 전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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