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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un 12. 2024

이성의 한계

이성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양자역학의 모순성이나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게임이론이나 치킨 게임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좀 더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결국 인생을 살만하게 해주는 것은 감정적인 것들이고 예상 밖의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의 한계 따위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을 거다.


그런데 왜 이성의 한계 같은 걸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원흉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성은 부처이자 예수이고 공자였다. 그리고 그 이성 광신도들은 황제도 제자로 두는 그리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게 그리스에서 멈추질 않고 유럽 전체를 먹어버렸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지더니 심지어는 동양의 한국까지 먹어버렸다.


어느정도냐 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아침 여덟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이성을 연마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하는 지경까지 왔으니...


오히려 적당히 체육활동이 있고 직업교육이 있는 서양보다 더 이성 광신도들이 되어 버렸다. 


기독교 광신도가 모여있던 서양에서 신은 죽었다는 니체가 나왔으니. 이성 광신도가 모여있는 한국에서 이성의 한계를 말하는 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우선, 이성은 아무런 힘이 없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욕망에서 온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답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이성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욕망과는 멀어진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 같은 것도 없다. 


니체와, 진화론을 들먹이며 3000장 분량의 유서를 쓰고 자살한 하버드생이 있었는데. 유서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해가 간다.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철학을 뒤지고 과학을 뒤져도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찾을 수 없다. 욕망을 억누르면서까지 이성에 집착하는 사람이 자살하는 건 이상할게 없다. 



사실 생각해보면 20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이성을 강조하지 요즘은 이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온갖 광고가 욕망을 부추긴다. 


그렇긴해도 아무래도 이성은 곧 성공, 사회적 지위, 교양, 고지능, 달변, 품위... 이런 것들과 연결되니 이성에 빠질 이유는 충분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이 아주 권장되는데. 그것도 적당히 하는게 좋아보인다. 왜냐면 욕망 없는 이성은 죽음으로 이어져도 이상할게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이었지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었다. 욕망이 머리끝까지 가득찬 사람에게 이성을 말한 것이지. 어린 애들에게 이성을 말한 게 아니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가 청소년을 위한 강의를 했다면 여자 꼬시는 법이나 부자 되는 법 혹은 잘 싸우는 법 같은 강의를 했을거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이 책을 읽지 않고 릴스를 본다고 큰 일난 것처럼 떠들 필요가 없다. 청소년은 이성으로 뭘 따져대기 보다 그냥 욕망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는 게 낫다. 학교에선 못배우니까 학교 끝나고 릴스에서 화려하고 즐거운 거라도 좀 봐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극단적이긴 해도, 이성을 따져대다가 결국 살 이유를 못 찾고 자살하거나. 이성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하루종일 누워 있는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보단. 돈을 더 벌려고 뭐라도 하거나 여자를 꼬시려고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 


어쩌면 20세 이전엔 모든 철학과 종교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릴스를 보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청소년에게는 '지금 당장 롤렉스를 사라' 혹은 '카마수트라' 같은 책 정도만 허용해주면 된다. 만약 윤 대통령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방글라데시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산율은 반등하고 자살율은 급감한다. 그렇게 되면 전세계에서 한국을 벤치마킹하러 올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고전은 제왕학이라 할만하다. 제왕을 위해 쓰여져서 제왕학이 아니라. 제왕에게나 필요한 이야기니까 제왕학이다. 권력이나 돈이 있어야 쓸모 있는 이야기여서가 아니고 이해력이 좋아야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다. 어느정도 욕망의 끝을 보고 욕망 너머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자기 일로 바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 거다. 


보통 사십대쯤 되면 어느정도 안정적이고 나름대로 인정도 받았지만 공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앞으로 고전은 40살 이하는 읽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만 그렇게 하면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멍청한 민족으로 소문이 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행복하면 그만 아니겠나. 



이성의 한계 2번. 이성은 답이 없다. 이성은 계산기다. 사람이 숫자를 넣어야 답이 나온다. 숫자는 욕망이다. 세상이 만드는 희로애락이다. 사람이 없이 계산기만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람이 계산하고 싶은 식이 없어도 아무 쓸모가 없다. 계산기가 없어도 사람은 어찌 저찌 답을 내겠지만, 사람이 없는 계산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문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사람이 먼저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예수, 부처 이런 죽은 사람들 말고. 살아 있는 나 자신. 내가 느끼는 것이 먼저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예수가 틀렸다고 신성모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보던 것은 머리가 과열된 현대인이나 동태눈을 한 한국인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사람도 화끈하게 죽이고 겁탈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었다. 그런 말을 할만했다. 하지만 한국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림하면 이성은 집어치우고 릴스나 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게으름이나 공허함 같은 그냥 개인적인 감정 부터


출산율과 자살율.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온갖 종류의 중독과 같은 정신과적 문제. 


모두 이성에 대한 광신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성이 없는 존재는 게으름 같은 게 없다. 바쁘거나 여유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똑같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여도 게으름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고 여유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다. 


그런데 이성이 있는 존재는 바빠야 할 때 걱정하고 비교하면서 행동을 못하고 여유 있어도 될 때는 걱정하고 비교하면서 쓸데없는 짓을 하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안티도트


우선 애초에 이성을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게 좋다.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와 논어를 정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상한 강요가 있고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니 그런 몹쓸 것에 빠지게 되는 거다. 


사회가 이성을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혹시 누군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야기를 꺼내면 미국 영화에서 책 읽는 안경잽이를 보고 일진들이 그러듯이 'look at that loser' 같은 말을 하면서 비난해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위에 예수가 있고 공자 위에 노자가 있다. 예수는 이성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바라면 이룰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유는 없다. 설명도 없다. 그냥 말할 뿐이다. 


공자는 예를 지키라 한다. 노자는 예건 이성이건 어떤 것도 붙잡고 있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라고 한다.   공자는 예를 무조건 지키라 한다. 반면 노자는 예를 지키기 싫으면 지키지 말라고 한다. 다만 예를 지키지 않으면 욕도 먹고 이래저래 피곤해질 것 같으면 예를 지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할 뿐이다. 


이성을 넘어선 것은 있다. 애초에 이성은 도구일 뿐이고 사람이 먼저다. 이성에서 나온 모든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성을 넘어선 것들은 이성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경우엔 이성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을 인정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성을 넘어선 것을 존중하게 된 것 같다.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 누구를 존경하는지 보면 의외의 인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성과 논리. 책과 지성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욕망과 느낌에 비하면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이 먼저다'를 잊지 말자. 살아 있는 나의 만족, 기분이 먼저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이다. 혹은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이다. 


물론 이성은 좋은 도구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좋은 도구다. 하지만 도구는 도구일 뿐 '사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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