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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un 13. 2024

영화 악마와의 토크쇼 후기

이 영화의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인공 잭의 아내 미니가 주인공의 파멸을 바란다는 해석.


두 번째는 미니는 잭이 원하는 것을 이뤄준 것이라는 해석.


첫 번째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자면, 우선 어찌되었던 잭은 많은 것을 잃었다. 연인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으며  자칫하면 살인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영화는 미니가 잭이 속한 사교클럽에 의해서 모종의 희생을 하게 됬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희생인지. 잭과 미니가 각자 그것에 대해 얼마나 알았고 얼마나 동의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때문에 미니가 잭에게 원한을 가지진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잭이 파멸하는 것과 맞물려, 미니가 악마가 되어 잭을 파멸시켰다는 해석에 신빙성을 더한다. 


하지만 이 경우엔 영화가 전하려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그저 맥락없는 악의와 잔인함으로 공포감을 조성했을 뿐인 3류 영화가 되어 버린다. 



두 번째 해석을 보자. 미니가 잭이 원하는 것을 이뤄줬다는 해석이다. 

 

영화에서 미니는 어려번 잭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보여준다.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도 잭을 위해 방송에 출연해 잭을 지지하고. 죽기 전에도 '이제 내가 도와줄 수 없으니 당신이 잘 해야 돼.'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잭은 많은 것을 잃었고,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 상태로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떻게 미니가 잭이 원하는 것을 이뤄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잭이 원하는 것은 애초에 소박한 행복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잭이 원한 것은 시청률 1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니가 악마가 되어 생방송에서 빙의하고, 사람을 산채로 녹이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결국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다'고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도 그건 타고난 빽이 좋거나, 재능이 있어야 한다거나, 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부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식의 인생관이다. 


두 번째는 '원하면 이룰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물론 원한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실패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이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이 '악마와의 토크쇼' 같은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는 흔히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의 파멸을 보여준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의 비도덕성이 업보처럼 돌아와 파멸하고. 실수 때문에 파멸하며. 때로는 별 이유도 없이 망하기도 한다.  


그런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원하는 것을 하려 들지 말아라' 라는 메세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영화라면 당연히 영화의 메세지는 연출가의 의도가 반영된 메세지가 아니라 현실의 일면을 반영한 메세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반영한 메세지는 과연 무엇인가? '악마와의 토크쇼'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도 얼핏보면 탐욕을 경계하는 메세지를 주는 영화처럼 보인다. 1등이 되려고 아내를 희생시키고 주변의 조언도 무시하다가 파멸해버리는 주인공이 '욕심을 부리지 말라.' 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욕심이란 사람이 사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아무 욕심이 없는 사람은 곧 아무 의욕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기쁨이 있을까? 보람차게 하루를 보내고 마음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좋은 욕심이든 나쁜 욕심이든. 개인적인 욕심이든 공익적인 욕심이든 어쨌든 욕심은 필요한 것이다. 욕심이 있어야 활기차게 살 수 있고 기쁨도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다가 파멸한 잭의 이야기 역시 설득력이 있다. 욕심은 사람을 활기차게도 하지만 파멸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마와의 토크쇼' 같은 이야기에서 무얼 배워야 할까. 


내 생각에 그것은 성경의 한 구절이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사람에게 소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소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이 어떤 소망을 가지든 그것은 사랑이 있는 소망이어야 한다. 소망과 사랑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면 그 중 제일은 사랑이다. 


잭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희생시키지 않을 기회가 있었고. 오랫동안 같이 해온 동료의 조언을 들을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랑없는 소망을 택했고, 소망과 사랑 사이에서 소망을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잭은 파멸하는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1위가 되겠다는 소망이 나쁜건가? 아니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다른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을 품은 자신이 아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1위가 유해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내가 더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으니 1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소망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군중의 요구에 편승해 1위가 되고 싶다거나 1위라는 허명 자체가 탐난다거나의 이유로 1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의 소망에 사랑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을 담은 소망도 실패하지 않나?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허명에서 나오는 소망은 실패하면 남는 것이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사랑을 담은 소망은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을 전파하는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작은 소망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길을 잃지만. 사랑이 담긴 소망은 성공하더라도 사랑을 전파하는 더 큰 목표가 남아 있고 실패하더라도 사랑을 전파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잭은 시청률 1위 달성에 성공했지만 당황하고 좌절하고 후회한다. 잭이 성공하기 위해 희생한 것들은 아무 의미 없이 희생됐을 뿐이기 때문이다. 동료들도 아무런 의미 없이 죽었고 아내도 아무런 의미 없이 희생했다.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어차피 영화란게 극단적이니 한 번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 잭이 시청률 1위를 찍으면 지구 멸망을 막을 수 있고 그래서 잭이 1위를 달성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비록 동료와 아내의 희생이 있었더라도 슬퍼는 할 지언정 후회하며 넋 나간 듯 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악마와의 토크쇼를 보면서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도 사랑의 부재에 있다. 만약 잭이 사랑이 넘치는 굳건한 인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세상을 위해 감당하겠다며 경건한 태도를 보였다면 영화는 호러 무비가 아니라 히어로 무비가 됬을 것이다. 단지 주인공의 성격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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