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말이다.
스님이나 할 것 같고, 호흡법을 연습해야 할 것 같고, 어딘가 거창해 보인다.
하지만 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을 차분한 생각, 자기 마음에 대한 성찰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영 맛이 안산다. 명상은 명상이다. 다만 명상이 너무 무겁고 먼 일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좀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사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명상과는 별 상관이 없다. 명상을 해서 나온 결과물일 뿐이지, 명상에 대한 글이 아니다.
명상록은 놀랍도록 상식적이다. 아우렐리우스와 우리에게는 이 천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책이 두 권 있다. 첫 째는 공자의 논어고 두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 세 책의 특징은 책을 쓴 사람도 인간적이고, 책에서 다루는 사람들도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물론 좋은 글이지만 책의 화자가 인간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문 용어가 나열된 책 중에도 좋은 책이 있지만 그런 책의 화자는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전문적 지식 그 자체에 가깝다. 한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는게 아니라 어떤 논리를 통해 어떤 결과가 나온다. 어떤 구조를 통해 어떻게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정해진 구조가 드러나는 글이라는 거다.
상식적인 책의 장점은 당장 당신에게 필요한 말을 해준다는 것이다. 명상록은 화가 난 당신, 공허한 당신, 두려운 당신에게 당장 필요한 말을 해준다.
명상록의 저자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동양 철학 중에서는 노자의 철학과 굉장히 닮은 점이 많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우주의 정신' '내면의 신비한 힘' '자연의 진리' '신의 뜻' 같은 것들은 노자가 말하는 도와 맞닿아 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원래 기독교든 불교든 서양 철학이든 동양 철학이든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무언가는 다 같은 것 아닌가요? 왜 특별히 노자와 아우렐리우스를 엮는 건가요?'
물론 그 말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와 기독교가 똑같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궁극적으로 같은 점이 있더라도 어쨌든 지향점이 다르고 표현 방식이 다르고 관심을 두는 주제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명상록과 도덕경이 같이 지향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주의 정신, 즉 도와 조화롭게 사는 삶이다.
조화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떠한 것이든, 자신에게 일어난 어떠한 일이든 불만을 품거나 화를 내지 않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상록과 도덕경의 표현 방식은 어떤가? 둘 다 자연을 빗대어 표현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듯이, 인간도 그러한 자연스러움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격적 신이나 현실적 사례를 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관심을 두는 주제를 보면 그 점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명상록은 선의와 공익을 강조하는 반면. 노자는 무위를 강조한다.
이는 노자와 아우렐리우스의 입장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노자는 평범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우렐리우스는 제국의 황제였다.
인간이 우주의 정신 혹은 도와 조화롭게 사는 방법은 인간 역시 억지로 무얼 하는 대신 무위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있고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있고, 수많은 유혹과 자극이 있다.
노자와 같은 시골 도서관 사서에게는 열 받게 할 사람도 별로 없고, 뭘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여러 명의 목숨이 달린 중대사를 결정할 일도 없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자신을 암살하려 드는 사람이 있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으며, 온갖 사연의 절박한 사람들이 갖가지 것을 요구해올 것이고, 외부 세력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오는 것을 책임지고 처리해야 한다.
황제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자리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야 하니 자연스럽게 살자는 마음만으로 자신을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선의와 공익과 같은 원칙을 좀 더 강조하게 된듯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자에게선 이상적인 면을 배울 수 있고, 아우렐리우스에게선 현실적인 면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노자와 같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아우렐리우스와 같이 여러가지 현실적 조건들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명상이라는 것은 누가하든 결국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아우렐리우스 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든 명상을 통해 우주의 정신 혹은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아우렐리우스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자연의 일부고 이성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상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아우렐리우스나 노자 같아질 수는 없는데, 그건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끝내야 할 윤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기독교 식으로 표현하자면 악마가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표현해보자면 명상을 이어가고, 명상을 통해 나오는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을 만한 굳건한 마음과. 단순히 지금 당면한 문제나 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 같은 개인적인 것들을 넘어 세상을 명료하게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쌓여 세상이 돌아가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 그런 일은 모두가 할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해낸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배움으로서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들과 말이다. 그런 면에서 명상록은 아름다운 기록이다.
명상록 발췌.
발생하는 일은 모두 정당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건의 연속 속에는 인과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들에 각각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자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은, 정당하고 적절한 질서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관찰을 시작했던 태도로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하여 모든 행동을 선의로 행하라, 진정한 의미에서 선의로. 모든 행동을 함에 있어서 이 점을 유의하라.
만일 당신이 당신의 본원으로 돌아가 이성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현재 당신을 짐승이나 원숭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당신은 10일 이내에 신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클로토 여신이 어떤 실로 당신의 운명의 실을 짜든, 당신 자신을 기꺼이 그녀에게 맡겨라.
어떠한 숙명 속에서도 나는 항상 행운아였다. 행운아란 행운의 선물을 자기 자신에게 주는 사람을 의미하며, 행운의 선물이란 훌륭한 성품, 훌륭한 지각력, 훌륭한 행동을 의미한다.
죽음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지,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든 찾아왔음을 기억하라. 그들이 지금 무덤 속에 누워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나쁜 일이겠는가? 더구나 그들의 이름이 잊혀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진실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겍도 관대하게 대하며, 진리와 정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의 활력을 얻고자 할 때는 당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미덕을 생각하라. 이 사람에게는 정력적인 점을, 저 사람에게서는 훌륭한 정신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실의에서 벗어나는 데는 주위 사람들의 성품 속에 들어있는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여러가지 미덕들의 표본을 보는 것보다 더 훌륭한 치료법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주위 사람들의 미덕을 바라보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당신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성적 존재에게 있어서의 자연에 따르는 행위는 곧 이성에 따르는 행위이다.
당신은 이미 죽었으며 당신의 인생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당신에게 주어질지도 모를 미래를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에 따라 살아가라.
인간은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가르쳐 개선시키거나, 아니면 사람들에 대해 참고 견뎌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 진실, 겸손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도 이성적 영혼의 특성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또한 법칙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성의 원칙과 정의의 원칙은 동일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한 일은 사회에 유익한 일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게도 유익한 일이다. 항상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고 간직하라.
삶의 기술은 무용보다는 씨름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인생에서도 예기치 않은 공격에 대한 굳건하고도 조심스러운 자세를 요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