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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un 22. 2024

쾌락과 고통은 같은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같은 것이다. 아주 잠시간 다르다고 느낄 뿐이다.


쾌락이 끝나면 고통이 오고, 고통이 끝나면 쾌락이 온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법칙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과 고통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쾌락도 고통도 멀리해야 한다. 흔히들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쾌락을 추구하는 만큼 동시에 고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멀리하는 만큼 쾌락도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살면서 쾌락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기왕이면 기분 좋은 일을 추구하는게 그래도 낫지 않을까요?' 


살다보면 이상형과 연애를 하게 될 수도 있고 큰 돈을 벌게 될 수도 있으며,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많은 사람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쾌락도 고통도 아니다. 그냥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의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쾌락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것은 쾌락이 아니다.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것은 고통이 아니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발가락을 문지방에 찧는 것도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다. 그것도 고통이 아니다. 발가락을 문지방에 찧으면 '고통스럽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새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 없는 통증이 있을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에 대해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당신의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다.


쾌락과 고통은 피할 수 있다. 그것은 폭염이나 배부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해해 보라. 


혹자는 그래도 쾌락과 고통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쾌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모르기 때문이 그렇게 말한다. 쾌락이 끝나면 고통이 온다. 고통이 끝나면 쾌락이 온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혹여나 쾌락을 끝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마약중독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쾌락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번 맛 본 쾌락은 더이상 쾌락이 아니게 된다. 점점 더 큰 쾌락을 찾게 된다. 그리고 쾌락의 끝은 결국 뇌를 직접 자극하는 마약같은 것들이다. 고통을 끝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온갖 고행을 하는 인도의 깡마른 수행자를 보라. 마약 중독자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눈빛이 조금 더 또렷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쾌락과 고통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둘 다 자유의 대척점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쾌락을 맛보면 쾌락을 찾으려 들게 되고 고통을 맛보면 고통을 피하려 들게 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당신은 온세상을 자유롭게 누비길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쾌락과 고통에 빠진다는 것은 넓은 세상을 두고 냉탕과 온탕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길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라는 제약이 없는 것이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어차피 자유로워도 살면서 즐거운 일뿐 아니라 힘든 일도 있을텐데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요?'  자유는 그냥 말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노인의 집 앞에 매일같이 초등학생들이 모여 딱지치기를 했다. 노인은 매일 같이 시끄럽게 떠들고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초등학생들을 쫓아내기 위해 혼을 내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초딩들은 금새 돌아왔다. 그러던 중 다른 노인이 그에게 초등학생들에게 집 앞에서 딱지치기를 하면 칭찬하며 매일 오백원을 줘보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 조언을 받아들여 초등학생들을 칭찬하며 오백원을 주기를 얼마간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 뒤 노인은 초등학생들이 집 앞에서 딱지를 쳐도 돈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딩들은 '뭐야, 돈도 안 주는데 내가 왜 여기서 딱지를 쳐줘야 돼.' 라며 노인의 집 앞을 찾지 않게 되었다. 


쾌락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피하려들면 당신의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잃게 된다. 쾌락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회피하는 일은 당신을 급박하게 만들고 현재에 불만족하게 만들며 당신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던 즐거움을 잃게 만든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그럼 아무런 목적 없이 살라는 말인가요?' 아니다.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목표를 정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그런 것을 추구하면 결국 당신은 정신없이 쾌락과 고통을 오가기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그보다 높은 목적을 가져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나.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일 같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혹자는 말할 수 있다. '그런 높은 목적을 세우면 와닿지가 않아서 열심히 추구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높은 목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당신의 높은 목적은 과학적 난제를 해결하거나 전쟁을 멈추는 것이 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돈을 많이 벌겠다는 높은 목표를 세울 수 있다. 그로서 당신은 세상에 풍요를 전파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흙수저라면 흙수저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메세지를 줄 수도 있다. 당신이 돈을 범으로서 더 풍요로워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에서 한 사람은 구원하는 셈이다. 그리고 사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신의 것을 주변에 전파하게 되어 있다. 


혹자는 말할 수 있다. '돈 같은 목표는 쾌락을 추구하는 목표랑 별로 다를게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의 진정한 목표는 사회의 이익이다. 당신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세상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려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당신이 먼저 풍요로워지려는 것이다. 돈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당신의 쾌락 역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당연히 당신은 다른 사람의 풍요를 해치거나 사회에 해가 되는 방식으로 돈을 벌기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목표는 돈이지만 더 큰 목표는 사회의 이익이고 세상의 풍요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것은 즐겁다' '이것은 고통스럽다' 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것은 즐거우니 더 해야겠다' '이것은 힘드니 하지 말아야겠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당신이 즐거움을 찾지 않아도 당신에게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고통을 피하려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할때 당신은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붙잡고 키우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즐거움을 기대함으로서 실망의 씨앗을 키우지 말고 부담을 줘서 밀어내지도 마라. 당신의 고통을 걱정으로 미리 맛보지도 말고 억울한 희생자가 되겠다며 붙잡고 있지도 말라.  


쾌락과 고통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없다면 약간의 고통을 추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쾌락에 빠진 사람은 쾌락을 놓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쉽지 않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고통을 놓고 할 일을 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매일 같이 한 시간씩 달리기를 하다가 어느날 폭풍이 와서 달리기를 못하게 된다면 그 시간에 당신은 미뤄왔던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매일 같이 한 시간씩 야동을 보다가 어느날 정전이 나서 못보게 된다면 당신은 화가 나고 불만족스러워 다른 일에 집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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