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종교인 뿐 아니라 정치인부터 작가와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으로 꼽는 것은 행복이다. 굳이 행복에 대한 명언을 듣지 않아도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SNS에서도 서점에서도 학교에서도 행복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지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일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행복에 대해 수 백 수 천 만명이 이야기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이야기 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사람들은 맛있는 걸 먹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며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보든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반복해서 묻다 보면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으로 수렴된다. A를 이루기 위해 B라는 일을 한다면 B가 더 상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일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 하기 때문에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탐구는 계속 이어진다. 배는 나무와 철의 정돈 된 덩어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항해를 한다는 배가 가진 고유한 목적을 이룰 때 쓸모가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은 각자의 고유의 특성을 이용해 목적을 이루도록 되어있다. 독수리는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날카로운 발톱과 뛰어난 시력을 가진 덕분에 멀리서 날아와 빠르게 먹이감을 낚아 챈다. 독수리의 목적을 뛰어난 시력과 날카로운 발톱에서 알 수 있듯이, 목적은 그것 만이 가진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만이 가진 특성은 지성이다.
즉, 지성을 활용해서 인간은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고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성을 활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지나친 가난이나 질병 등이 지성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기 힘들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탐닉하게 되는 쾌락이 지성적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난과 질병의 해결은 철학보다 정치와 경제학 그리고 의학에서 논의할 문제이다. 하지만 쾌락에 탐닉하거나 올바른 삶을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철학을 통해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성을 활용한 올바른 삶을 사는 단순한 방법은 모든 것에서 중간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과분한 명예를 추구하고, 뽐내고 자랑하며 성공을 떠벌리는 허영심 많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의미 있는 일도 못하고 돈과 명예와 같은 사회적으로 좋은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더 나쁘다. 자신의 가치를 알고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이룬 것을 존경받기 위해 떠벌리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허영심과 소심함이라는 양 극단을 택할 것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중간을 택해야 한다. 만용과 비겁함의 중간인 용기를 추구하고, 방종과 무기력 사이의 절제를 추구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일에는 지나치지 않고 적당한 중용이 있다. 중용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성향과 살아온 방식이 있고 말 몇 마디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로는 지나친 것을 경험해보고, 반대로 모자란 것도 경험해보는 것을 통해 가장 쉽게 중용을 알아내고 중용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많은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중용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중용을 찾는 방법은 숫자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중용을 찾는 것이다. 숫자게임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A가 1부터 50까지 중 하나의 숫자를 생각한다. B는 숫자를 하나 추측해서 말하고, 그럼 B가 말한 숫자가 A가 생각하는 숫자보다 더 높은지 낮은지를 B에게 말해준다. 이 과정의 반복을 거치다 보면 점점 정답에 가까운 수를 말하게 되고 결국 정답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어, 돈을 쓰는 것에서의 중용을 찾기 위해서는 술 자리에서 계산도 하고 비싼 물건도 사면서도 살아보고 허튼 돈은 하나도 안 쓰겠다는 각오로 카페도 안 가고 믹스커피만 마셔 보기도 해본다. 그러다 보면 “비싼 물건도 대부분 시간 지나면 별 감흥이 없구나.” “그래도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마셔야겠다.”같은 생각이 들고 적절한 중용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또 중용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사람은 비난 받게 되므로 비난을 듣는 것을 통해 지나침이나 모자람을 알 수 있다.
중용을 통해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용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통한 도덕적인 미덕이 차선적인 행복이라고 말한다. 앞서 모든 것은 각자의 목적에 맞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덕적인 미덕은 살면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최선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선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우리 안에 최고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성이 있지만 동시에 채찍을 통해 다뤄지는 말이나, 과일을 쌓아 놓은 덫에 스스로 빠지는 원숭이처럼 고통과 쾌락에 휘둘리는 면 역시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동물적인 면을 극복하고 내면의 최고의 것들을 실현하는 것을 추구할 때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특성은 지성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족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행위는 관조이다. 즉, 관조하며 지성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이다. 돈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나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자족적인 특성을 가지고, 지성적 활동에 방해되는 쾌락을 멀리한다는 점에서 불교적 이상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불교는 해탈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지성적 삶에 대해 “그런 삶은 인간이 도달하기는 너무 높은 경지이다. 누군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어떤 신적인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상적인 모습은 현실적으로 도달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이지만 도달하기 힘든 이상을 얘기하는 대신, 현실적으로 중용을 따르는 차선적인 제 2의 행복을 이루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다. 제 2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미덕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 역시 인생 전체에 걸쳐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한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용기나 절제 등은 삶의 목표보다는 태도에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개인이 인생에서 개인적으로 추구할 것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들처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목표를 정해주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삶의 목표를 모든 것에는 그것이 가진 특성에 걸맞는 목적이 있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개인의 삶의 목표는 남들과 다른 나만이 가진 특성을 살리는 것일거다. 고려해야 할 것은 살리고자 하는 특성은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특성이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친 가난이나 인간관계에서의 소외로 인해 행복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그 특성에 따른 활동은 그 활동 자체로 만족스러워야 한다. 내가 수학에 재능이 있더라도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면 수학과 관련된 인생의 목표를 세웠을 때 행복하기 힘들 것이다. 즉, 돈과 명예 인간관계 등 외적인 조건을 행복하기 힘들만큼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 그 자체로 행복하고 내가 가진 비교적 희소한 특성을 살리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할 때 행복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인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과,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특성에 맞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며 인간은 지성이라는 인간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성을 통해 지나침도 모자람도 아닌 중용을 찾을 수 있으며 중용을 추구함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 중용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에서 경험을 통해 찾는다면 본능을 무작정 따를 때 오는 후폭풍을 피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일들을 생각해야 하며,
필멸의 존재이니까 필멸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되도록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쾌락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으며 논의를 통해 사람들을 바꿀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이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통해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적인 것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말은 단순히 내가 생각하는 최대 행복을 쫓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최고의 행복을 쫓으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모른다.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이 최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반면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목표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적어도 목표를 잃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최선은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구에서 온다는 믿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걸맞는 삶을 살 것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