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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ul 18. 2024

맹자가 말하는 용기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옛날 북궁유는 용기를 이와 같이 길렀다. 살을 찔러도 움찔하지 않고, 눈을 찔러도 피하지 않았으며, 남에게 조금만 기를 꺾여도 장터에서 매맞는 것같이 생각하여, 낡은 옷을 걸친 천인에게도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는가 하면 만승의 임금에게도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어, 만승의 임금에게 대들기를 하잘것없는 천인에게 대들듯이 여기고, 제후도 겁내지 않아 저쪽에서 욕설이 오면 반드시 이쪽에서도 욕설을 보냈다.


그리고 맹시사는 용기를 기른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이기지 못할 사람에게 대들기를 이길 것 같이 해야 한다.적의 실력을 알아낸 뒤에야 전진하고, 이길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맞선다면 이는 3군을 두려워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꼭 이길 수 있으랴.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의 용기를 생각해보면 맹시사는 증자와 같고 북궁유는 자하와 같아서, 두 사람의 용기는 누가 더 훌륭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시사의 용기는 기를 지키는 것에 요점이 있다. 옛날 증자께서 자양에서 이렇게 말씀한 일이 있다. '너는 용기를 좋아하느냐? 내가 스승 공자께 들으니, 스스로 반성해서 옳지 못하면 비록 낡은 옷을 걸친 천인에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스스로 반성하여 내가 옳다면 아무리 천만인일지라도 나는 가서 그들과 대적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저 맹시사가 기를 지킨 것은 증자께서 기를 지키신 것만은 못하다.'


<맹자>


용기란 무엇인가. 용기란 자신의 기운을 지키는 힘이다. 북궁유가 용기를 기른 방법은 아주 직관적이다. '절대 쫄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쫄리는 상황에서 더 기를 발산했다. 당신의 기운은 당신의 근본적인 힘이다. 기운이 꺾인다는 것은 당신이 태어날 때 부터 가진 당신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원하는 것을 이뤄내며 즐거움을 쫓고 점점 더 발전해나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능력을 잊어버렸다. 당신의 기운이 꺾인 것이다. 당신은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으며, 나대서는 안 됐고, 지켜야 할 규칙과 체계, 도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북궁유는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 죽지 말라. 조금이라도 기가 죽는 것이 느껴진다면 그때가 바로 더 의식적으로 기를 펴야 할 때다.'


당신이 북궁유와 같이 상사를 들이받고 부모에게 대들고 귀찮은 카톡을 전부 읽씹해 버린다면 당신은 외로워질 것이다. 가난해지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당신의 기운을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할 일이다. 당신의 기운은 당신이 잃은 것보다 당신에게 걸맞은 것을 당신에게 가져올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꼭 주먹을 내지르거나 차갑게 정색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기운, 당신의 당신다움이 꺾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웃으면서 싸울 수도 있다. 당신은 당신답게, 상식과 고려해서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북궁유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당신의 기운이 꺾이지 않게 해야한다.


나는 북궁유와 같은 용기를 지녔던 사람을 보았다. 그의 기운은 이내 그에게 부와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사람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는 언더독으로서 강자를 들이받았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가 누구 못지 않게 성공한 강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언더독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예전에는 젊음의 패기나 신선한 개혁으로 보였던 것들이 어느새 오만함과 상대적 약자에 대한 탄압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들이 받는 일 자체에 취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것은 용기다. 이기던 지던 당신이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에서 당신은 용기를 보였고 당신의 기운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물론 이기고 싶을 것이다. 허나 당신이 승리에만 취해 있다면 당신은 어느새 싸워야 할 때가 아닐 때 조차 승리하기 위해 싸우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싸움은 이기고 지고를 떠나 시작하는 순간 이미 당신의 기운을 낭비하게 된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기운이다. 쓸모 없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싸워야 할 때 싸워서 지는 것이 낫다. 당신이 싸워야 할 때는 당신에게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 당신은 분노할 것이고 억울할 것이고 기운이 꺾이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싸우지않아도 될 싸움을 하게 될 때 하게 될 생각들도 있다. '이건 내가 질 수가 없지' '그런 멍청한/약해 빠진/한물 간/뭘 모르는 사람들 정도는 쉽지' '저 인간은 좀 좆돼 봐도 돼.' 등등


그러나 질 수 가 없는 싸움 같은 것은 없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나는 절대 지지 않는다'고 말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내가 어떻게 져?' 같은 생각을 했다가는 이내 지게 될 것이다.


설령 누군가 좆되봐도 될만한 사람이라도 그를 좆되게 하는 것은 당신의 역할이 아니다. 당신이 당신의 기운에 따라 싸움을 하지 않고. 도덕적 잣대나 신체적 조건, 사회적 지위, 논리와 지식의 우월함 같은 이유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으로 옳은 싸움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허나 당신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 도덕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그러한 싸움으로 당신을 이끄는 것은 당신의 용기가 아니라 오만일 것이다.


 


증자는 북궁유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증자는 스스로 반성해서 옳지 못하면 비록 낡은 옷을 걸친 천인에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반성해서 옳다면 아무리 천만인일지라도 대적하겠다고 말한다.


북궁유에게는 그러한 판단이 없다. 절대 쫄지 않을 뿐이다. 천인에게나 임금에게나, 한 명에게나 천 명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증자가 무조건 북궁유보다 나은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교활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교활하다. 교활한 마음은 자기 자신조차 속인다. 당신이 '옳지 못한 싸움은 피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충분히 무언가를 알기 전까지 당신은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상황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교활한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두려움을 포착해 '옳지 못한 싸움은 피해야한다'고 당신을 꼬드기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망설임. 그러한 미적지근함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 동안 당신의 용기는 제 역할을 못하고 당신의 기운은 이미 꺾여 버린다. 북궁유의 마음에는 그러한 교활함이 없다. 북궁유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들이받기 때문이다.


결론은, 당신이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당신은 증자 이전에 북궁유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미 누구 못지 않게 용기를 발휘했으나 용기가 꺾일만한 상황에 놓인 것이 문제라면 당신은 증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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