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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hyun Kim Dec 24. 2020

우리의 환대

너와 나의 울타리

우리는 각자의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각자가 마주하고 바라보는 각자의 세상은 누구와도 같지 않다. 삶의 경험, 교육, 살아온 환경과 그 속에서의 감정, 판단, 배움과 성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부모의 세상을 만난다. 부모 세상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답습하며 자란다. 그 울타리가 애정과 보호였을지, 아니면 사실은 강압과 학대의 울타리였는지는 아이가 판단할 몫이다. 어떤 울타리도 완전할 수는 없으니 대부분은 조금씩 미세하게 섞여 있을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따뜻한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사랑의 울타리 속에서 아이를 보호했다고 굳게 믿을 것이다.


아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의 울타리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는다. 누군가는 얼른 그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다거나, 벗어나고 싶다고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여전히 부모의 울타리 속에서 안정을 찾을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세상에서 조금씩 벗어날수록 부모는 서운하다. 그 어떤 부모도 아이가 만나고 형성하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자신과 닮은 자신의 아이는 자신과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역설적이게도, 울타리를 형성하는 데 노력을 많이 들였을수록, 아이를 많이 사랑하고 보호했을수록 더욱 서운함과 믿음은 확고하다.

"그러면 안 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느낄 걸."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너는 왜 그래."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결국 부모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세웠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거대한 넓이의 부모의 울타리 안에 세워진 작은 피난처 정도임을 깨닫는다. 경제력과 권위의 불균형,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적 역할에 아이는 묶여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의 울타리를 내보여 그것이 그곳에 있도록 '인정'받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혹시라도 부모가 그것을 부술까 애써 꽁꽁 감추고, 이따끔씩 그 안에 들어가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장희원 작가는 '우리의 환대'를 통해 아이의 세상과 울타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모는 주인공 영재가 이상한 행동을 몇번 했지만, 그 이후에 자신의 몫을 '곧잘 해온 아이'라고 믿는다. 그 기준은 자신들의 세상이다. 자신과 닮은 영재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이 경험을 통해 얻은 삶과 행복의 진리를 성실하게 쫓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재가 그만의 작은 울타리를 꼭꼭 숨긴 채, 언제라도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영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를 낸 그날 이후로, 자신의 울타리를 숨겨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을 것이다. 당장 인정 받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부모의 울타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영재에게 어땠을지는, 영재가 비로소 부모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눈이 부신 모습으로' 자신의 세상을 내보이는 것에서 답을 알 수 있다.  


3년이란 시간과 공간이 가른 부모와 영재의 재회를 앞두고, 부모는 '옷 가지와 먹을 거리'를 준비하지만 끝내 건네주지 못한다. 그 일용할 양식과 의류는 부모의 울타리에서 자신들의 기준으로 제공하던 사랑과 보호를 상징하므로. 부모는 여전히 영재가 자신들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나, 영재는 더 이상 부모의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마주하므로. 영재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울타리를 넓고 견고하게 갖춰 그 안으로 마침내 부모를 초대한다.


영재의 울타리는 더 이상 부모의 울타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마주한 부모는 "내 울타리에서 묵고 가라"는 영재의 제안을 끝내 뿌리치고 도망친다. 부모는 더 이상 영재의 울타리를 '인정'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부모 울타리의 펜스를 허물어 영재의 울타리와 함께 더 넓은 공간을 '공유'할 것인가. 아니면 배타적인 자세로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키며 떠나버린 영재의 흔적을 지울 것인가만을 선할 수 있을 뿐이다.


울타리에 관한 이야기는 부모에 아이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선생님과 제자, 선배와 후배, 친구와 연인 등 사람이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관계에 통용된다. 모든 사람의 세상은 다르므로 모든 사람의 울타리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문을 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펜스를 단단하게 만들어 누구도 자신의 울타리를 건들지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걸 자신의 울타리를 내보이는 것보다 선호하고,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울타리 너머로 자신의 울타리를 치며 상대를 그 안에 가두고자 한다.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사랑과 보호를 제공하겠다는 오만한 독선을 변명으로. 그래서 상대가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는 걸 거부하거나,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 할때마다, 설득, 강요, 집착과 폭력을 동원해 묶어두고자 한다. "사랑해서 그랬어요." "사랑이 죄가 되나요"와 같은 뻔한 합리화가 뒤따른다.


또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는 적당한 보호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기준들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의 울타리가 그따구면 우리사회의 울타리 속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소외시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울타리에서 사회의 울타리가 좋아할만한 가공해 내보이기에 익숙하다. 그래서 나는 '국룰'이나 '인싸'와 같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인성검사를 풀 때면 실제 내 울타리와는 무관하게 사회의 울타리가 좋아할만한 문항들을 적당히 맞춰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너와 나의 울타리 벽을 허물어 우리 함께 그 넓은 공간을 공유하자는 뜻이다. 그래서 나의 울타리를 보여주고, 너의 울타리를 여행하며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자는 의미다. 너의 울타리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나의 울타리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너의 울타리에서 환대받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나는 나의 울타리의 문을 자주 여는 사람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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