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날의 소회
곧 가을학기 개강입니다. 지난 봄날에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복기하며 더 나은 가을날을 상상해 봅니다.
<2025년 3월 20일>
매년마다 우수교원으로 선정되어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특별전형 입학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 추천한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돌봄'의 시간을 더 갖고 고요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으니 오히려 감사합니다만.. 그럼에도 제 연구분야에서 새롭고도 도전적인 에토스를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마다하진 않습니다.
작년에 페북에 올린 글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붙입니다: "제 연구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추천할 학생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전형료 면제이며 면접 없이 입학됩니다. 작은 프로그램이지만.. 지도교수로서 100번 밥 삽니다. 100번 커피 삽니다. 학생은 스터디에 100번 참여합니다.“
<2025년 4월 3일>
심사의 계절입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어학 전 분야를 총괄하는 책임연구위원이라서 수많은 연구제안서의 심사방안을 검토하고 조정하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의 번뜩이고도 도전적인 기획안에 감탄도 하지만.. 인문사회 학문 분야에 펀딩이 턱없이 부족하니 대다수가 탈락된다는 현실이 야박할 뿐입니다.
아카데미아를 지키고 있는 모든 분들께 동학으로서 감사와 위로를 전합니다. 특별히 학교든 학과든 함께 일해볼 동료도 마땅치 않은 환경에서 묵묵히 버티면서, 연구자로서나 지식인으로 품격을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 모두 존경합니다.
제안서 쓰시느라고 모두 수고하셨고 게이트키퍼들 판단에 너무 들뜨지도 흔들리지도 마시기를.. 다시 힘차게 돌파하시거나, 빙 돌아서 창조적으로 탈출하시거나, 학제적 방법을 구하며 더욱 명철해지시기를..
그리고 이제 만개할 벗꽃은 꼭 보러 다니시기를.. 우리에겐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25년 6월 16일>
1. 이번 학기에 한 과목만 가르쳤고 그것도 3시간 연강으로 가르친 터라 종강을 했음에도 일상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네요.
2. 안식학기를 1년 반 전에 마쳤고 지원금 받은 조건으로 <언어차별과 통치성>에 관한 논문을 사회언어학회지에 게재했는데 그후로 1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연구자 활동을 시작하면서 1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네요.
3. 그럼에도 평화롭게 지낸, 그래서 자족할 수 있는 일상이었습니다. 돌봄의 시간이 필요했고 교회에서도 많은 일을 도왔습니다.
4. 무슨 일이든 더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과 미국 땅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그러나 익숙한 담론질서로부터 새삼 크게 놀랍지만 않은) 사건 사고를 바라보면서 납작하게 업드려 숨을 고를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5. AI, 권위주의 통치가 위압적으로 느껴집니다. 화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와 공간에서도.. 그걸 감당할 묘안은 마땅치 않지만..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지낼 일상이 그래서 더 필요했을 터입니다.
6. 정희진 선생이 예전에 칼럼을 모아 책을 내면서 제목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로 붙였어요. 글을 쓰는 여러 욕망(예: 미학적 열의, 정치적 이유, 역사의식, 자기의) 중에 자신은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고,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고 했죠. 서문에 적힌 글로 기억하는데 책을 다 읽진 못했는데 서문만으로 책 내용을 다 알 것 같았죠.
7. 대개 나쁜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죠. '나쁘지 않게 보이지만 나쁜' 사람들이죠. 그들로부터 아파하면서, 아니 아프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아픈 지도 모르며 자책하거나 자신과는 다른 아픔으로 고통받는 약자를 가해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8. 어째거나 저는 올 여름부터 '반드시' 일을 개시하고 뭐라도 써야 합니다. 연구비를 받았고 결과물 제출 마감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편저서 준비하면서 받아둔 챕터 원고도 빨리 읽어야 합니다.
9. 일을 다시 하자고 다짐하다가 또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묵상한 에스겔 33장이 좋았습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나팔을 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