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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Jun 02. 2021

자유 사랑 언어 6

'레미제라블'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은 숨 막히는 소설이었다. 씨줄과 날줄로 잘 직조된 스토리였다. 한 축에서는 네 인물(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이 살아가고 연애하는 가볍고/무거운 삶의 내러티브가 등장했고 또 다른 축에는 보헤미아를 침공한 소련군의 점령 그리고 그곳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투쟁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물처럼 엮여져 있는 철학적 사유... 찬사가 아깝지 않았다.     


2. 영화 ‘레미제라블’은 이보다 한 수 위였다. 프랑스라는 공간과 혁명사라는 역사 위에서 계몽/해방의 정치학이 거칠게 등장한다. 그리고 장발장을 포함한 주조연급 인물의 뜨거운 사랑과 삶의 고뇌를 묘사한 삶의 정치학도 동시에 끼워져 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능동성, 또 한편으로는 그(녀)를 꼼짝 못하게 위축시키는 구조화된 질서로부터 영화의 장면은 완벽하게 직조되고 편집되었다.     


3. 심지어 개인사에다 하나님 왕국의 직선적 세계관을 영화의 처음과 끝에 붙여두었으니 크리스쳔 지식인을 또 한번 숨 막히게 한다. 슬프고, 기쁘고, 아프다. 분투하는 삶과 거대 이념을 그렇게 수용할 수밖에 없다. 눈물이 콧잔등에 타고 흐르면서 피식 웃게 된다. 


4. 동시에 내 삶의 여러 결정적 사건도 떠오른다. 하나님의 계획, 내가 개척했다 자부하는 삶의 능동성과 여전히 피하지 못하는 존재의 무력함. 역사성과 지금 이 순간 당장 내가 감수하는 일상의 내러티브가 혼란스럽게 내 머릿 속을 채우다가 다시 무언가 반성되고 해체된다.   

  

5. 영화를 보는 내내 근본주의 기독인이라면 아마도 정치사회적 맥락을 제외시키고 등장인물의 헌신적 사랑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회심의 사건에 집중할 것이다. 변화-지향적인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혁명의 이미지, 해방의 텍스트에 가슴이 뜨거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이든 국가든, 역사는 언제나 그 모든 것의 총합 이상이다. 


6. 비판적 역사의식을 거세시킨 인생도, 무신론으로 바라보는 세계도, 연애의 내러티브만 집중하는 탈근대적 실험도 삶과 죽음을 극도로 환원화시키는 몰지성적 태도이다. 선별적인 삶의 단면만을 주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인문지식을 품겠다면 삶의 내러티브를 쉽사리 예단하고 일반화하지 마라. 물론 해방과 계몽의 역사도 폄하할 수 없다.


7. 만약 당신이 인문사회 영역에서 예비지식인으로 성장 중인 크리스쳔라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제발 역사의식을 갖기를... 혁명의 역사가 있다고 인정하기를... 우리 모두 자신의 지적 토대 위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꿈꿔야 한다. 바꾸진 못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씨앗을 뿌리는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성공과 긍정의 복음만 붙들면서 이 세상 살 때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만 하지 말자. 


8. 또한 삶의 정치학, 일상의 내러티브를 주목하고 존중하자. 일상과 사랑의 내러티브가 없다면 우린 그저 하나님의 복음이든 비판이론이든 거대 담론에 우리 몸을 숨길 뿐이다. 그건 아주 비겁하고 안이한 태도이다. 물론 내 모든 지식과 실천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듭나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9. 그만한 지적 훈련과 배짱이 없다면, 세상 풍조에 휘둘리다가, 예수쟁이들 모인 곳에서만 은혜 충만한 기독인으로 변장하여 살아갈 뿐이다. 올해도 작년처럼 하나님에게 좀 더 달라고 자꾸 조르지만 말고,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식스 센스 영화에 나오는 유령 같은) 기독 생활을 청산하길 바란다. 성경을 볼 때도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의 작은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살아 숨쉰 사회역사적 맥락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10. 쓰여진 누구의 역사든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다. 거대 담론과 삶의 내러티브를 공존시킬 것. 그리고 전방위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버리지 말 것. 난 그렇게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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