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코로나 감염으로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던 2020년 여름에 북한 관료는 개성 남북연락소를 공포스럽게 폭파하고서는 군사도발까지 거친 말로 예고했습니다. 서글프고도 비참한 감정을 느꼈죠. 그때가 국내 체육계의 폭력과 폐쇄적 소통의 보도기사가 넘칠 때였어요. 격리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시대에 폭력을 과시하는 관행, 위계를 강요하는 권위를 매일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곳도 이곳도 모두 무섭고도 불편하고도 애달팠습니다.
그만한 권위주의 질서는 개별적인 폭력의 총합이 아닙니다. 사회구조적으로 만연한 권력관계 혹은 담론질서로부터 이해되어야 합니다. 고작 무력한 청년을 가해하는 체육계에서나 그랬을까요? 권력을 세습하는 교회, 갑질의 소통방식에 익숙한 기업, 위계적 질서로 가득 찬 학계는 어떤가요?
예를 들면, 내가 아는 학술단체는 설립되고 나서 두 분의 교수님이 서로 은퇴할 때까지 15년인가를 회장, 부회장 자리를 주고받았죠. 특별히 그분들이 꼭 자리를 지켜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편협하고 배타적인 권위주의 질서가 구조화된 곳이기 때문이죠. 놀랍지도 않지만 거기 회원도 임원도 모두 공부 많이 하신 박사님이고 교수님이었습니다. 어느 학술 분야와 다름없이 지금까지 사람과 지식이 넘쳤겠지만 그렇게 소수가 지배하는 권위주의가 자리를 잡으면 소통하고 개방하고 서로 다른 말을 섞는 문화는 없습니다. 누군가 골목대장을 하고 있는 곳은 대개 외연의 확장도, 횡단적 시도도, 인격적인 소통도 없습니다.
민주주의 이름의 절차적 원칙은 사라집니다.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합니다. 개인들은 입을 다물고 좀처럼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무나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죠. 단체의 이름으로 떡고물까지 챙기는 핵심층(inner circle)이 생기면 위계와 경계의 권력관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재수 없는 어떤 곳만 ‘폭력을 행사했다’라는 명시적 가해로부터 고발을 당할 뿐입니다. 대개 깊게 성찰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못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습니다. 권력은 편향적으로 계속 조직화됩니다. 그래서 북한 같은 곳은 전에도 무서운 곳이었지만 중단 없이 더욱 공포스럽게 구조화됩니다. 이때 우리가 수도 없이 들은 처세술이 있지요.
‘가만히 있으라.’
지배적인 권력이 주도하는 권위주의 사회질서로부터 무력한 개인들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좋은 처신이었겠죠. 그런데 잠시만요. 그건 세월호 사건 때 애들이 배 안에 갇혀 계속 들었던 말 아닌가요? ‘가만히 있으라.’ 그걸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던가요?
누르면 눌리면서나 살아가는 주조품의 인생일 순 없죠. 거친 바다는 무서웠고 폭우로 농작물을 쓸어가는 성난 하늘은 매정했지만 우리는 무력하게 당하지만 않았어요. 어부든 농부든, 고깃배를 만드는 기술이든, 농경술이든, 뭐라도 감당할 수 있는 걸 감당하며 살아오기도 했죠. 가만있지 않았기에 만들어진 문명사도 있었습니다. 어느 때든 구조화된 권력질서로 개인들은 위축되었지만 그래도 바꿀만한 것을 바꿔온 삶의 능동성은 있었습니다.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표현하면서도 능동적인 삶의 실천을 시도해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우린 글과 말로부터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폭력과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상상을 하고 기획도 하고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적 행위는 다양합니다. 경청하기. 읽기. 다시 읽으며 요약하기, 스토리로 전달하기. 손을 들고 질문하기. 반박하기. 논증적으로 쓰기. 토론에 참여하기. 그런 수사적 의례를 매일처럼 반복한다면 내게, 나를 둘러싼 관계에, 내 주위의 관행과 질서에 어떤 변화가 없을까요? 언어사용이 임시적 혹은 도구적 기술 수준이 아니라 내게 일종의 의례가 되면 그때는 내 정체성과 관계성이 달라질 수 있죠.
나만의 언어사용이 권위주의 질서로부터 버틸 수 있는 자기배려의 기술이 될 수 있을까요? 개인이 새롭게 배우고 이전과 다르게 사용하는 언어란 건 고작 미학적 실천이고 윤리적 변화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구조가 말과 글을 통해 유희적이면서도 저항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고 기획하고 저항하고 실천하는 의례를 어디까지 허락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순응적인 언어만 사용하게 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관계는 아직도 많습니다. 말과 글에 관한 관행과 실천의 문제는 자기계발을 넘어선 정치적 기술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나도 용기를 내서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질문할 것입니다. 대자보든, 이메일이든, 국민청원이든, 글로 옮길 것입니다. 신문 칼럼을 쓰든, 학회지에 논문을 쓰든, 영어로든 한국어로든, 내 감정을 표현하면서 논증 기반으로 의견을 만들 것입니다. 내가 개인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자유와 저항은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며 이의를 제기하며, 그걸 모두 내 삶의 자원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보안과 격리, 차별과 배제, 폭력과 위계의 권위주의가 넘치는 지금 시대에서 나는 버틸 수 있습니다.
센 누군가가 오랫동안 관행적인 질서를 주도하던 곳에서 다른 말을 섞거나 다른 삶의 방식을 표현한다고요? 이건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내게 불편하고도 겁나는 언어적 실천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말과 글에 관해 가르치면서 나도 함께 다시-배우면서 언어의 실천을 두고 의례적으로 매일 연습합니다. 매일 읽습니다. 매일 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 서로의 인격이 존중되는 관계성,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구조입니다. 그걸 말과 글로, 서사와 의견으로, 표현하며 기대합니다. 주장하고 반박합니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내가 품은 용기는 일상의 언어적 의례만큼 조금 더 견고해집니다. 혹시 모르죠. 고만한 수사적 실천이 내 삶의 공간에서 쌓이면서 틈도 보이지 않던 사회구조 한켠이라도 언젠가 크게 뒤흔들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