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동일 Sep 17. 2021

언어와 권력 5

시험의 윤리, 수험자의 권리

이번에는 2012년에 해커스 어학원의 시험 문항 유출 사건을 두고 제가 쓴 경향신문 컬럼을 공유합니다. 시험에 관한 부정행위 문화는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해커스 학원에서 점수를 올리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아직도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고부담 언어시험을 준비하는 교육문화를 나름 열심히 비판하고 연구문헌도 남겼지만 개인 연구자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해커스 어학원이 토익 문항을 시험장에서 빼돌리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다. 어학원 측은 개발 및 시행사의 횡포를 지적하며 수험자의 알 권리를 주장했고 많은 학생들은 기출 문제의 복기는 죄가 아니며 출제기관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어학원 측 입장에 동조했다. 이윤의 탐욕보다는 마치 국내 학습자를 위해 결행한 정의감마저 느껴졌다. 


큰 시험이 창궐하는 곳에서 시험의 윤리적 엄격성을 주장하기 쉽지 않다. 새로운 신분을 갖기 힘든 생득사회가 끝나고 동등한 선발 기회가 허락된 성취사회가 시작되면 한방의 시험만 통과하면 출세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 시험은 문지기로서 힘을 갖게 되고 어떻게든 그 시험만 통과하자는 사람이 넘치게 된다. 수험자가 시험을 이기겠다고 끙끙댈 때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시험이 만든 질서만은 결코 흔들지 않는다. 해커스는 국내 수험자의 알 권리를 주장하지만 토익공화국의 질서 안에서 한국의 수험자 권리는 고작 기출 문제와 답을 곧장 알아야 하는 수준이 된다. 


해커스는 ETS가 시험문항을 공개하지 않은 것을 반박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을 몰래 알아낸 것은 분명 비윤리적인 수준을 넘어선 행위이다. 혹 시행사가 시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수험자의 알 권리가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토익의 정보는 이미 충분히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동형의 시험이 반복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토익에 대해 몰라서 손해 볼 일은 별로 없다. 교수 몇 명이 합숙하면서 급조한 영어시험을 치루는 수험자와 비교해볼 때 토익 수험자가 기출문제를 알아야 할 권리 문제는 쟁점이 되기 힘들다.


오히려 학원에서 시험전략을 반복적으로 연습시키면서 시험결과의 진정성을 왜곡시키는 해커스의 시험준비 행위가 수험자의 진짜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시험기술 중심으로 공부한 수험자의 성적이 실제 추론하고자 하는 능력보다 과대평가되거나 오차범위 밖의 허위 점수결과로 의심할 수 있다면 시험전략 학습에 접근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수험자는 억울하다.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해당 시험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는 수험자의 권리가 지켜지지 못할 수 있다. 


기출문항을 곧장 알아야 하는 수험자의 소극적 권리보다 시험을 치루지 않거나 시험점수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적극적인 권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경로나 방법으로도 언어능력이나 업무역량을 보여줄 수 있도록 큰 시험들이 수험자를 줄 세우지 말아야 한다. 언어능력은 복잡하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비교당하지 않을 권리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시험도 명약이 될 수 없다. 표준화된 언어시험은 진짜 언어능력을 조심스럽게 추론할 수 있는 돕는 손일 뿐이고 고작해야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한 수준의 시험에 인생을 거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시간이나 돈 좀 아끼자고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시험점수로 고약한 문지기 역할을 맡기는 학교와 기업에게 우린 좀 더 화를 내야 한다. 토익의 공리성에 수험자도 힘을 보탰지만 그들보다는 큰 시험을 준비하는 공부만을 독려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으름장을 놓는 자들에게 자꾸 화가 난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252126065&code=990304



작가의 이전글 언어와 권력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