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권력 4

국가가 책임진다는 영어교육

국가가 자꾸 책임을 질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의 교육담론을 바라보면서 2007년 12월에 쓴 컬럼을 여기서 곻유합니다:

대선후보들이 영어교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영어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며 대입에서 영어과목을 폐지하며 말하기를 강조하는 국가공인 영어인증제를 추진한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국가가 책임지고 우리는 수혜를 받을 수 있을까?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큰 영어시험의 시대가 있었다. 학교나 공장이 정신없이 세워지는 근대의 시대는 국가가 책임지는 시험이 효율적이다. 기업과 학교에 별도 시험이나 정책을 감당할 돈이 없었다. 맞춤형이나 특성화의 여유도 없었다. 그저 국가가 훈육하고 관리해야 했다.  일본도 경제를 재건할 때 STEP이란 국가시험이 있었고 1990년의 경제 성장이 시작된 중국에도 CET란 국가시험이 있었다. 규모의 경제를 갖추려는 유럽공동체도 언어능력인증도구가 만들어졌다.      

교육부는 이 시험들을 예로 들면서 한국의 국가영어인증제를 추진하려 한다. 그런데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보면 대량생산, 규격화, 관료적 정책이행의 관행을 벗어나지 못한 이런 국가들의 경제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물론 영어교육정책을 언급하진 않지만 경제 패러다임과 동일한 맥락에서 영어시험과 교육정책 관행을 이해할 수 있다. 분명 큰 시험들의 위력이 지금 한풀 꺾인 것이 분명하다. 지금 성장하는 국가들은 다양한 영어교육평가 컨텐츠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규모의 영어교육, 국가가 책임지는 영어시험을 집중하고 있다.      

영어시험과 정책을 개발할 때는 시대적 흐름을 읽어야 한다. 영어에 관한 한 전 국민의 눈높이가 만만치 않으며 이제 더 이상 영어교육과 영어인증의 다양한 필요와 목적을 국가가 책임진다고 큰소리치기는 쉽지 않다. 기업과 대학, 특목고에서 상상력이 넘치는 영어교육과 새로운 평가방법이 필요하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수준을 떠나 스토리텔링, 문화적 친밀감, 감성과 관계성, 리더십 등의 교육내용이 계속 유입될 것이다. 이걸 국가에서 인증제나 시험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올 여름 교육부가 발표한 것처럼 국가가 영어시험을 만들어 2년 만에 국제 수준의 영어시험을 운용하고 토플과 같은 시험을 대체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무지이거나 교만이다. 기존의 국가공인시험부터 호랑이 눈으로 관리해야 하고 공인시험에 관한 정보는 일반사용자들과 투명하게 공유시켜야 한다. 이제 한국의 영어교육의 필요와 목적은 하나의 시험으로, 정부가 책임진다는 정책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수능에서 영어과목을 빼고 국가영어인증제를 도입하고 말하기를 강조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여전히 큰 시험의 시대이며 국가가 관리한다. 만약 위압적인 목적으로까지 사용된다면 시험영어가 반복적으로 학습될 것이고 의사소통의 언어, 즉흥적인 말하기는 단순화되거나 왜곡될 것이다. 일상성을 가진 즉흥적인 언어활동을 배우기 위해서는 작은 현장의 평가행위가 보장되어야 한다.    

 

국가가 정말 해줘야 하는 일은 돕는 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정책과 작고 다양한 시험을 허락하는 일이다. 학교나 기업이 미덥지 않아도 다른 목적으로 다른 시험을 만들고 시행하는 경험을 허락해야 한다. 자꾸 권한이 주어지고 만들어 봐야 전문성도 생기는 것이다. 국가는 수능이든 토플이든 새로 만드는 시험이든 평가의 권한을 이양시키지 말고 공유하거나 분산시켜야 한다. 그리고 적절하게 평가의 권한이 위임되고 있는지 도와주고 감독해야 한다. 그리고 영어교육에 관한 전문자료를 수집하고 쉽게 가공해 전 국민들과 컨텐츠를 공유해야 한다. 영어와 평가에 관한 거짓정보에 대해 국민에게 교육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처: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071207/85201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