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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Sep 17. 2021

언어와 권력 3

토익 200만명 응시생과 입학사정관 제도

홍준표 대선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대학 수시입시 철폐', '고시 부활'을 공약으로 걸고 있습니다. 공정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선거전략일텐데 11년 전 제가 당시 시작되던 입학사정제를 바라보며 쓴 경향신문 컬럼을 여기서 공유합니다:  


 토익의 연간 응시인원이 200만명을 넘어섰다. 1000개가 넘는 기업과 단체에서, 100여군데가 넘는 학교에서 토익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중에 여러 학교들이 잠재력, 적성, 수학능력 등의 단면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입학사정관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사정관 업무를 담당할 인력이 충원되고 있으며 교과부 장관은 현 정부 임기 내 입학사정관제를 반드시 정착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200만명이 토익을 보는 한국에서 입학사정관 제도가 건강하게 정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익의 성장은 한꺼번에, 빨리, 많이, 행정편의를 고려해서 ‘측정’을 해야 했던 근대 한국의 산물인데, 입학사정관제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천천히, 이리 저리 살펴보며, 주관적인 판단도 해보자는 탈근대적 평가모형이다. 속도전으로 성장한 한국의 여러 사회적 단면에서도 그렇지만 시험 현장 역시 어울리지 않는 두가지 색깔이 앞으로도 공존할 분위기다. 실제로 대학에선 입학사정관제로 입학한 학생이 토익을 학부과목에서 배우고 졸업자격을 갖고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토익을 수차례 응시한다. 


  앞으로도 토익과 입학사정관제는 이처럼 공존할까? 아니면, 토익이든 새 국가시험이든 큰 시험의 권한은 한풀 꺾이고 사정관 선발문화가 국내 교육현장에서 자리를 잡을까? 이 질문은 미래 한국의 교육 민주주의의 성장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기구를 통제하는 특정 기관과 계층이 지역적인 수준의 권력 생산자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수준으로 판단한다. 민주적 교육평가가 있는 곳이라면 특정 기관의 획일적인 시험정보에 무기력하게 의존하기 보다는 다양한 교육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시험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을 공유시킨다. 평가자끼리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응시생들이나 그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도 정보를 나누고 협력을 해야 한다. 


  사정관 제도는 이러한 민주적 평가방식에 부합된다는 장점이 있다. 특정 시험이나 획일적인 경로로 독점되었던 평가정보보다 교사, 학부모, 전문가집단, 인증기관, 봉사단체 등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사정관에게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보통 사람들이 평가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평가권도 가질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심지어 학생 스스로 제작하고 평가한 것도 사정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데, 사정관 제도가 자리를 잡을수록 선다형 필기시험의 의사결정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주위에서 판단하고 추천한 것, 개인이나 팀이 프로젝트로 만들어본 것을 사정하는 권한이 여러 사람들에게 확대되고 위임될 것이다. 


  그러나 토익 응시생이 200만명을 넘는 상황에서 사정관제에 기반을 둔 교육문화가 새롭게 형성될 수 있을까? 꼭 토익이 아니라도 수백만명의 수험자들이 비슷한 유형의 선다형 지필시험을 준비하면서 입학, 취업, 승진을 준비하고 있다. 원형감시감옥의 상황처럼 분류, 외부적 감시, 제재 등의 불편한 정서가 요청된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심리 속에 숨어 있다. 자신이 직접 포트폴리오로 구성하고, 동료나 선생님이 판단하거나 지역기관에서 추천한 것은 공정한 평가자료로 신뢰받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이처럼 평가문화와 의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데 사정관제가 서둘러 우리의 전통이 될 수 있을까? 


  정치 민주주의도 새로운 제도로 해결하지 못한다. 사정관 제도가 하나의 문화로 변화를 유도하려면 우리의 의식도 함께 변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특정 시험의 결과로 사람 뽑는 제도에 익숙한 우리들이 사정관제의 의미를 공유하고 사회적으로 그 필요를 약속하는 시간은 현 정부 임기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사정관 제도의 기능성만을 서둘러 부각시키다가 무늬만 다른 또 하나의 권력이 우리의 교육현장을 억압할 수 있다.


출처:

 https://m.khan.co.kr/opinion/public-opinion/article/200905131813005/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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