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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Sep 17. 2021

언어와 권력 2

토플대란

국가 주도의 언어평가 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는 중에 관련 미디어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쓴 컬럼이 눈에 들어와서 여기서 공유합니다. 


(1)

2009학년도부터 외국어고 입시 전형에 토플이 제외된다. 토종시험이 대안인 듯하다. 예전에도 토플.토익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이번은 분위기가 다르다. 이제 더 이상의 대란은 없을까? 영어시험을 기획 설계하고 영어 평가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해 본다.


우선 시험은 더 이상 흔들지 않아야 한다. 토플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간단한 영어시험도 목적에 따라 타당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물며 토플.토익은 효용가치도 높고 잘 만든 영어시험이다. 우린 이러한 시험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던 기업과 학교의 무지나 횡포에 주목해야 한다. 업무 담당자는 행정편의적으로 토플.토익 성적을 요구하지 않았는지, 혹은 시험의 목적이 아닌 시험 자체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시험은 시험을 쉽게 대체하지 못한다. 시험의 각기 다른 필요와 목적에 대해 건강한 의식이 없다면 토플.토익을 퇴출시켜도 또 다른 공룡이 시장에 등장할 뿐이다. 그 시험은 이전 공룡이 가지고 있는 역기능을 그대로 승계할 것이다. 대란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토종 시험과 외국산 시험을 맞붙이는 대립 구도도 신중해야 한다. 누구든 당장에 토플 같은 시험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시행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한다. 평가기관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가의 외국산이 품질적인 측면에서 더 좋다면 국산 제품에 마음 붙이기가 어렵다. 애국심에 호소하며 토종시험 알리기도 한계가 있다. 시험은 약속인데 토종 영어시험 정보는 대부분 제한적이다. 연구개발 논문 하나 변변히 찾아보기 힘들며, 영어 평가 전공자 한 명 배치되지 않은 채 국가공인.국제공인이란 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다. 국제공인이란 의미는 참 모호하며, 국가공인도 전문가 집단에 의해 엄정하게 심사됐는지 궁금하다.


이처럼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토플과 토익 성적이 요구되지 말아야 하고, 국내 영어 평가기관들은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당장에는 어떤 묘안이 있을까? 공신력 있는 국가 차원의 시험 개발과 시행에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의 시장 구도는 한동안 유지돼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혜안은 영어시험을 서둘러 분화하는 것이다.


토종시험을 보면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고 그저 비슷한 모양이다. 이럴 때 작은 규모의 특수목적형 시험을 개발해 시행하면 공룡시험의 거품이 빠질 수 있고 토종시험의 시장이 차별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 표준의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오랜 기간 교육시장을 지배해 온 큰 시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시험이 필요한 곳도 참 많다. 영어수업.관광.무역 등 다양한 영어 사용 환경에서 영어능력을 세부적으로 모형화해 목적형 시험을 만들어 사용하는 평가문화가 시작돼야 한다.


크고 작은 영어시험을 기획하고 개발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많아도 시험을 필요와 환경에 따라 개발해 줄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영어교사에 관한 계획은 많지만 영어시험 전문가 교육과정은 없다. 교육부도 영어시험이란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반드시 사람을 키워야 한다. 시험을 직접 만드는 인력 네트워크가 없다면 공룡시험의 세상은 없어지지 않는다.


'영어들'의 시대다. 이제 '영어시험들'의 시대가 시작돼야 한다. 그 영어시험들을 우리가 직접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이라도 영어시험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는 부서장들은 자신의 조직에서 필요한 영어능력이 무엇인지 마라톤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 직접 제작하든 외부에서 가져오든 필요한 영어시험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평가 책임자에게 물어보고 따지고 압박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또 하나의 시험 공룡이 또 다른 대란을 일으킬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2007년 4월 25일 시론.


(2)

 최근 ‘토플대란’의 원인 제공자로 언론의 비판을 받아온 국내 외국어고의 입시전형이 결국 2009년부터 변경되었다. 한동안 토익이 뒤흔들리더니 이젠 토플이 입시전형에서 퇴출되었다. 대학에서도 부적절한 토플의 사용을 자제하겠다고 발표했으며 국내에서 개발한 영어인증시험을 고입과 대입시험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정말 이제는 토종시험이 국내 입시전형에 반영되는 영어인증시험으로 사용되는가? 더 이상의 시험대란은 없는가? 여러 현장에서 영어시험을 개발 연구하는 입장에서 몇가지라도 당장 알리고 싶다. 


 우선 영어평가 연구자의 관점에서 봐도 토플과 토익이 잘 만든 시험이다. 연구개발, 데이터관리, 시험준비 측면에서 국내 어느 평가기관도 따라가기 힘든 컨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토플과 토익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업과 학교의 무지와 횡포다. 관행적으로 또 행정편의적으로 토플이나 토익 성적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어능숙도 평가의 목적이든, 수학능력을 심사하는 자리이든 토플과 토익은 문항난이도와 내용적절성에서  부적절할 수 있다는 의심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외국어고와 대학에서 토플과 토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고입과 대입전형에 반영되는 영어인증시험은 수험자의 인생항로를 결정하는 고부담시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인증시험기관은 연구와 개발 전문성이 부족하다. 전문인력도 여전히 부족하다. 수능이나 토플을 가르칠 전문인력은 많을지 몰라도 영어시험을 직접 만드는 일에는 아직 전문인력이 모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험이나 문항유형은 천편일률적이고 어휘, 문법, 독해, 청해를 평가하는 기준이 오랜 전과 비교해 특별한 차이가 없다. 충분한 학습자료도 없다. 국제공인, 국가공인이라고 광고를 해도 안을 들여다 보면 영어평가 전공자 한명 없이 시험을 근근히 만들고 시행하는 곳이 태반이다. 


 이에 반해 국가가 주도하는 영어시험 개발과 시행에 큰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한국과 유사한 환경을 가진 아시아와 유럽 국가의 선례를 보더라도 국가가 개입하여 시험을 개발하고 시행하는 것은 분명 대안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서는 영어시험을 중소기업, 학교 단위에서 개발하여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지속적인 투자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가 주도한다고 해도 당장에 토플이나 토익 같은 시험 하나를 후딱 만들어서 보란듯이 시행시킬 수는 없다. 당장에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지배적인 하나의 영어시험을 당장에 침몰시키고 또 다른 시험으로 당장 교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반시장적이기 전에 참 순진한 발상이다. 연구개발에 근거해서 시험모형이 설계되고, 전문가에 의해 문항과 채점이 관리되며, 시행은 엄정하며, 무엇보다 충분한 시험 준비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평가기관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한 5년은 국가 주도적인 투자가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  


 국가 주도적인 영어인증시험이 당장에 등장하지 못한다. 입시전형에 토플은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입시에 반영시킬 영어능력인증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토플은 버리고 토종시험을 마지못해 사용해야 하는가? 토종시험이라면 어느 시험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시험 자체에 순진한 타당성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토종시험을 사용하느냐, 그렇다면 어느 시험이 가장 우월한가 논의하는 것보다 평가기관의 윤리의식, 시험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캠페인이 우선 필요하다. 우리나라 영어인증시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시험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의식 수준에 있는 것이다. 토플이 없는 입시전형에서 수년 동안 국내 영어인증시험에 관한 의심과 불만을 지워버릴 방법은 시험 사용자 집단의 참여의식 밖에 영향력 있는 대안이 없다. 


 예를 들어 영어인증시험 시행기관은 시험의 개발과정, 평가내용, 시행관리, 시험준비 등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약속하지 않는 시험이라면 시험 사용자 측에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시험은 약속이다. 시험은 시뮬레이션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때문에 어떤 시험이든 완벽할 수 없다. 그래도 시험은 수집된 시험정보를 이용해서 수험자의 영어능력이나 수학능력에 관해 추론해야 한다. 수험자 측에게 어떤 목적에서 어떤 영어능력 단면의 평가인지 구체적인 약속도 없이 시험을 치룬다면 그 시험 결과가 타당할 수 없다. 앞서 토플은 잘 만든 시험이라고 했다. 약속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험자들은 토플이 어떤 시험인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보고서나 웹페이지 등에서 얼마든지 정보를 구해볼 수 있다. 국내인증시험 사이트를 들어가면 마치 생색내듯이 간략하게 영어시험 내용과 절차가 설명된 경우가 있다. 마치 시험 정보를 많이 주면 줄수록 시험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믿는 듯하다. 국내인증시험 홈페이지에서 자랑보다는 시험내용에 대한 약속이 충분할 수 있도록 시험 사용자들이 해당 평가기관을 압박해야 한다. 


 입시전형에 반영되는 영어인증시험은 백화점에서 물건 잘 못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시험 때문에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면 소송도 걸 수 있는 것이다. 영어시험에 관한 한 한국인의 소비자의식 수준은 바닥이다. 고입과 대입 뿐 아니라 편입과 입사시험도 그렇다. 인증시험을 사용한다곤 했는데 작년 문제가 다르고 올해 문제가 다르다. 난이도도 예측할 수 없고 문항 내용도 종잡을 수 없다. 그러한 시험은 수험자집단에게 공정한가? 아니다. 기본도 없는 시험이다. 조직적인 약속이 없는데 시험의 공정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영어인증시험의 공정성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방법은 내가 보기에는 자발적인 영어평가기관의 책임의식이 아니다. 시험사용자가 먼저 불평하고 요구해야 한다. 


 토플대란 이후에도 영어인증시험의 문제점은 여전히 곳곳에 잠복해 있다. 문제점의 해결은 또 다른 시험, 혹은 토종시험의 등장이 아니다. 평가기관과 시험 사용자의 윤리와 권리에 관한 캠페인이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시험은 여전히 우리 자녀, 주변 학습자들을 부당하게 압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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