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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Oct 18. 2021

freedom, love, languages 38

유미의 세포들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3년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1154772


1. 케이블 방송을 본 지 3-4년이 되었는데 시즌마다 뭐든 1-2편은 보는 것 같다. 이번 가을에 가장 주목할 만한 TV극은 단연 TvN ‘유미의 세포들.’ 일단 만화에서 TV 매체로 옮긴 서사이고, 주인공 유미의 이성애 관계를 자신 내면의 여러 세포들간 대화로, 그것도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 점이 흥미로운 기획으로 보였다. 매체를 옮기면 텍스트적 효과는 새로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2. 그렇지만 본방 사수는 커녕… 졸면서 몇 번 보긴 했지만 너무 재미가 없다. 이유가 뭘까?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로맨스 장르에 흥미를 잃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매체 서사에 관심이 줄고 있는 것이다. 6-7년 전인가 스토리텔링 BK 사업단장을 맡을 때 공부를 더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쉽게 사업단도, 강의도, 관련 연구도, 모두 중단되었고.. 그러다가 호기심이 사라진 것 같다.


3. 어째거나 이만큼 살아오니 매체고 뭐고 간에 TV로 전달되는 로맨스 자체에 몰입하기 힘들다. 사랑하고 살아가는 현실의 실존적 고통을 줄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비판적 의식을 지우면서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다. 사랑이 유지되려면 고통스런 의미협상과 적절한 사회적 조건이 허락되어야 한다. 그러나 TV 로맨스는 콘텍스트적 변수를 제한하고 내면의 갈등과 역동성도 온전히 묘사하지 않는다.  


4. 로맨스 서사의 심층 문법은 처음-중간-끝, 균형-불균형-균형이며, 몇 가지 사건을 사슬처럼 시간과 인과로 연결하면서 배경-도입-문제-갈등-해결의 선형적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고 살아가는 무언가는 이와 같은 문법의 완결성, 사건의 연속성으로 해석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도 경계선조차 모호한 불확실한 실체이다. 


5. 둘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는 건 TV극에 나오는 것처럼 주연과 조연으로 구성된 사건보다 훨씬 복잡하다. 알 수도 없고, 제한된 시공간의 매체에 다 싣기도 불가능한 변인은 대부분 생략되거나 축소되고 그저 익숙한 로맨스 문법이 우리 기억에, 집단의식 안에 내면화된다.


6. 익숙한 서사 형식은 다양한 서사의 내용까지도 본질화한다. 예를 들면, 갈등은 시작되고 점차 복잡해져야 하며, 서사적 종결은 '갈등 해소'의 효과를 갖는다.  그와 같은 서사의 내용과 형식은 우리 삶에 내면화되고 살아가는 방식의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적 속성까지 갖게 된다. 이걸 라깡의 방식으로 말하면 의미작용은 주체성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주체의 위치는 구조화된 의미체계 안에서 불안정하게 마치 환영처럼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7. TV로 통해 전달되는 조작적인 연애 서사가 세상 밖에서 연애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데 어떻게 TV 로맨스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8. 넘치는 매체 로맨스의 형식체계에 우리 모두 익숙해지는 만큼 그것이 우리가 실천하는 로맨스의 의미체계가 되고 있다. 만화도, TV극도, 할리웃 영화도, 주말에 우리가 친구와 나눈 구술 대화도, 구경꾼으로 학습한 지배적인 연애 문법을 따르면서 다른 종류의 로맨스를 상상할 힘도 사라진다. 시작하면 종결해야 하고, 갈등은 깊어지고 그걸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 


9. 그런 점에서 익숙한 문법을 따르지 않는 서사 콘텐츠는 늘 매력적이다. 내가 참 좋아했던 ‘효리네 민박’과 같은 방송물이 그런것 아닌가. 인접정보를 묶인 통합체적 콘텐츠라기보다는 계열체적 선택에 집중하고 반복적인 일상으로 채웠다. 처음-중간-끝의 완결성보다는 풍경과 행위성으로 채워진 계열체적 추가 정보가 넘치는 콘텐츠였다. 그런 게 지금 내 일상과도 다를 바가 없다.


10. 효리네 민박도, 내 일상도, 드라마틱한 사건의 사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지금 당장도 우리 내면에,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눈에 띄게 구성할 수 있다. 나는 그저 내 일상을 인접성의 통합체적 의미체계로만 구성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뿐이다. 


11. 영화는 전통적으로 선형적 인접 사건/정보에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나마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작품이 마찬가지 이유로 좋았다. 창조성이랄까, 세상을 버티는 힘은, 인접과 인과의 선형 정보가 없어도 만들 수 있는 속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 읽히지도 않을 이와 같은 글을 내가 담담하게 계속 남길 수 이유 역시 ‘노력한 만큼 해피 엔딩’, ‘인풋만큼 도출해낸 아웃풋’ 등의 인과, 혹은 선형적 모형에 연연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12. 나는 “이미” 통합적 의미체계로부터는 다 이루었다는 마음으로 살려고 한다. 결핍의 문제/원인으로부터 결과물을 도출하는 서사적 모형으로 살지 않으려고 한다. 허락된 시공간만큼 새로운 계열체적 선택을 채우며 올해도 시간을 흘러 보내겠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아도 "이미" 만족스러운 삶의 양식을 지향한다. 


13. 중간부터 봐도 괜찮은 서사,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아도 괜찮은 의미구조, 사건과 사건의 연결이 반드시 엄밀하지 않아도 되는 줄거리. 그런 걸 내가 버티는 삶의 양식에 적용한다. 내 나이쯤 되면 그런 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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