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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Apr 22. 2023

집으로 가는 길 10

다행히 중간고사 기간


1. 학술논문에 재미로 읽는 산문을 끼워 넣곤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렵고도 지루한 논문 쓰기를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 없다. 


2. 지난 겨울에 ‘비판적 존재론과 브리콜라주 연구활동’ 주제로 내 연구활동을 성찰한 학술논문을 만들면서도 그랬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글이 참 좋았고 나도 모르게 논문 어딘가에 한 구절을 이렇게 끼워 넣었다:


3. ‘내 연구활동은 단단한 저항의식을 가진 활동가의 삶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공간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루키가 자서전적 에세이에서 자신을 물고기로 비유하면서 ”물속에서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서는 죽고 마는(Haruki, 2016, p. 28) 저술 작업의 일상적 필요를 언급한 것처럼, 나도 버티기 위해서라도 비판하고 저항하는 주체성의 연구텍스트를 꾸준히 숙독했고 그걸 학생들에게도 가르쳤다.’*


4. 물고기처럼 나아간다는 것이 발전이나 계발의 지향성을 뜻하진 않았다. 다시 살아가고, 다시 쓰며, 다르게 기억하고 편집하는 글쓰기 직업의, 뭐랄까 지루하더라도 값진 일상의 변화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5. 그 구절보다 바로 앞쪽에 나오는 하루키의 메타포가 사실 더 좋았다. 논문에 끼워넣진 못했지만 하루키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작가의 유통기한을 십 년 정도로 두고 어느 시점부터 ‘날카로운 면도날’이 아닌 ‘잘 갈린 손도끼’가 필요하며, 다시 시간이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가 아니라 ‘잘 갈린 도끼’가 요구된다고 했다. 


6. 정말 그렇지 않던가? 탁월한 연구자, 혹은 작가적 삶을 사는 분들 중에 명석하기만 한 분이 누가 있던가? 오랜 시간을 버틴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실하고도 자기 삶에 열의를 가진 분들이다.


7. 같은 논문의 다른 구석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을 짚어보며 이렇게 내 삶을 반추하기도 했다:


8. ‘무력과 모순을 직면하면서... 나는 어떻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건 사이드의 고백처럼 “일상화된 삶의 이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주변화되는 것... 그것은 독특한 즐거움이 됩니다”(Said, 2012, p. 76)란 묘한 문구의 여운처럼, 기득권력의 바깥으로 밀려난 연구자 주체가 자유의 공간을 만낄할 수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특정 진영과 경계선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딜만한 수준으로 (또 한편으로는 모순적 연구자의 정체성 덕분에) 연구활동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9. 중간시험 기간이라 한 주 동안 수업이 없다. 한 주라도 쉴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렇지만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일상으로는 내가 쓰고 싶은 건 쓰지 못할 것이다. 


10.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물고기처럼 몸을 흔들어 이번 학기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도 무난히 감당할 수 있기를..


*논문 출처: 신동일. (2023). '비판성'의 새로운 탐색: 비판적 존재론과 브리콜라주 연구활동의 관점에서. 질적탐구, 9(1), 3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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