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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Feb 26. 2023

집으로 가는 길 9

연구자의 삶

1. 일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기계식 청축 키보드를 장만했다. 묵혀둔 자료를 꺼냈고 써둔 원고도 꺼냈다. 


2. 많이 망설였다. 내가 만든 텍스트, 만나고 시간을 보낸 사람들, 소속된 아카데미아에 무력감, 절망, 배신... 내가 해온 일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지 막막했다. 리서처의 삶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확장성의 한계를 만났다.


3. 창밖을 보며 슈베르트 곡을 낮게 틀어 두었는데.. 배경음이 되지 못했다. 감정선을 자꾸 건드렸다. 아마도 개강이 코 앞인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전수연의 피아노곡으로 바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내다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4. 지난 1월에 멀리 부산에서 강연을 했다. 아내와 여행이나 할 생각으로 초대에 응했는데 혼자 가게 되었다. 3시간 강연하고도 남은 분들을 도와주다가 기차에 탔는데 누군가를 도왔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때 내 모습이 플래시백처럼 떠올랐다. 


5. 내가 하는 연구활동이 커다란 돈벌이가 되거나 각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개의치 않았고 '(예비)연구자를 위한 연구자'라는 심정으로 늘 성실하게 공부했고 적금 붓듯이 학술 텍스트를 만들었다.


6. 내 영어이름이 'Jacob'(야곱)인데 성경에서 가져왔다. 연약했던 야곱의 사역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꿈꾸는 요셉(Joseph)들을 돕는 일이다. 꿈을 전수하고 소망을 심어주면서 요셉들보다 '앞서' 쓰임 받은 자가 야곱이다. 아프리카 단기선교 현장에서 만난 목사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받았다. 


7.  나는 요셉들로 생각했던 무수히 많은 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의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요셉들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성실하게 리서처의 삶을 살아왔지만 학교뿐 아니라 어디서든 강가의 물줄기는 더욱 거세기만 했다. 징검다리(의 계시도 소망)는 모두 사라졌다.


8. 리서처로 버티기도 힘들었다. 내게 인색하게 허락된 연구자원을 붙들고 그럭저럭 버티는 일상은.. 마치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버티고 있는 노점상의 일과와 다름이 없다는 느낌이랄까. 


9. 점심식사를 하고선 겨울 날씨로 중단했던 트래킹을 개시했다. 늘 가던 곳이고 지치긴 해도 멈추지 않고 걸었던 곳인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숨이 너무 찼다. 오르막에서 몇 번을 멈추고 허리를 세우면서 거친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10. 늘 가던 곳까지 도저히 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려가기도 애매한 위치이고 차가운 바람에 땀을 흘릴 수만 없어서 스틱에 의존하며 앞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몸이 기억하는지 하늘이 도왔는지 그럭저럭 그렇게 가던 곳까지 갔다. 


11. 내려와서 한참을 쉬면서 원기를 회복하는데 너무 좋았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힘이 들지만 좋았다.' '호흡이 가빴던 만큼 생명의 역동성을 크게 느꼈다.' 


12. 아마도 리서처의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생계도 감당해야 하고 이것저것 빼고 나면 남은 시간도 그다지 없다. 여전히 힘들겠지만.. 그래도 리서처로서 솔직하고 가감없이 내게 허락된 호흡을 다 쓰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멋진 삶이 아니었던가. 


13. 돌이켜보면 리서처로서 좋았던 환경은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나눌 사람도 별로 없었다. 관행을 따르기만 싫었고 그러다보면 기득권력으로부터 경원되고 배제되기도 했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은 내게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존적 투쟁이었다.


14. 다행히 경이로운 수준의 호기심과 모험심은 남아 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도 텍스트도 많이 쌓여 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숨어도 지금과 다름없는 권력관계와 내면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15. 등을 돌리고 잠에 든 것으로 보이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리서처로, 스칼러로 남은 삶을 계속 살까 싶어." 아내는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응. 그래."라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숨을 가쁘게 하는 일정이나 목표는 사실 없다. 같이 해볼 사람도 없다. 그래도 노아의 방주 작업처럼 '혼자서라도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16. '대단한 것도 없다.' '실패가 뻔하다.' '또 다른 낭비일 뿐이다.' 그렇게 누군가 폄하하겠지. 다행히 내가 지금까지 학습한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헌신과 낭비는 세상의 잣대와 좀 다르다. 개강을 앞두고 성급한 결정일지 모르겠지만.. 이번 인생은 별다른 옵션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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