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해가 더 이상 뜨지 않아
그때 입사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말이다. 인생 최악의 선택을 자신있게 한 나였다. 그런 말이 있다. 할까 말까 할땐 해라. 그런데 이제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할까 말까 할 땐, 끊임없이 심사숙고해서 선택해야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최종 합격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난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매일 아침 여러 조간신문을 읽고, 논술을 쓰고, 몇시간씩 뉴스를 볼 정도로 진심이었다. 정말 열심이었다. 외무영사직을 준비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던 이유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너무너무 기자가 되고 싶어. 나는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어. 라는 생각이 날 아침 6시마다 눈 뜨게 했고,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 읽고 쓰고 말하는 거. 누구보다 좋아했던 나였기에, 언론사 준비는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내 마지막 선택은 어땠던가. 여러 언론사 필기시험과 면접을 앞두고, 나는 괜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전혀 내 관심사와 관련이 없는 유통업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난 알고 있었다. 들어가면 나는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합격했을 때 기쁘지 않았다는 걸.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간절했던 그 회사였겠지만, 나에겐 갑작스레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걸 알면서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사를 결정한 그 다음주, 경상도에 위치한 한 연수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좋았다. 입사를 했으니 앞으로 나는 먹고 살 걱정은 할 필요 없겠구나 싶었다. 또, 언론사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이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논술을 잘쓰니까, 회사 다니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직하면 되지. 라는 생각에, 불안감에, 연수원에 시사상식 책을 챙겨갔을 정도로 나는 아마 불안했던 듯하다. 연수원에서 만난 동기들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다른 회사를 다니다가 이직을 한 케이스였다. 첫 직장으로 들어온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이 회사는 다니기 좋은 회사다. 돈도 많이 주고 복지도 좋은데 업무강도도 낮다.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는 나로선 아직 현실감각이 민감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의 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아, 나는 좋은 회사에 왔구나. 꿈 이런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다니면 되겠다. 라는 생각이 연수원이 끝날 무렵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앞에 닥친 검고 거대한 파도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유통의 ‘유’자도 모르고 들어간 나, 심지어 관심조차 없던 나는 그곳에서 업무적인 것때문에 힘든 것보다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회사였다. 연수원 동기들이 말했던대로 연봉이 높고 복지가 좋은 건 사실이었다. 업무강도도 낮았다. 하지만, 같이 일해야하는 사람들은 내 눈엔 정말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만난 부장은 신입인 나를 이유없이 미워했다. 흔히 말하듯 꼽을 주고, 인신공격을 했다. 내 사수는 내 또래의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인수인계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무언가 물어보러가면 귀찮다는 듯이 얘기하고, 상처 주는 말을 일삼았다. 같이 일하는 나이가 있는 동료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을 했다. 최악이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고, 가슴이 난도질 당한 듯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그리고 대학교에 가서도 항상 좋은 사람들을 만나, 나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던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와선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차차 얘기하겠다.
지옥같은 2023년을 보내고 만난 2024년의 초입에서도 소위 말하는 꼰대 부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역시 내게 인신공격을 했다. 그뿐 아니라 막말하는 동료들, 남성위주의 이 집단에서 나는 너덜너덜해졌다. 밝고 환했던 내가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우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