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다.

좋아 죽을것 같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나빠서 죽을것 같지도 않다.

by 동칸

1. "내일 죽는다면 뭘 할까 고민해봤는데, 그냥 평범하게 오늘과 같은 일상을 보내다 죽고 싶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최근에 본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이다. 당장 내일 자신의 삶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아낼 것이라는, 현재에 지극히 만족하는 삶을 사는 주인공이 꺼냈던 말이었다. 역시 주인공이야. 희망과 행복이 가득 차 있는 세계에 살고 있구나. 대단해.


2. 나는 어떨까. 한번 생각을 해보자. 마지막 날에 외국으로 떠날까. 외국의 멋진 풍경을 보면서 생을 마무리하는 거야. 시간이 없으니 유럽권은 힘들고 동남아 정도 갈 수 있으려나. 그래도 장례는 한국에서 치러야 하니까 외국은 패스. 적금을 해지해서 펑펑 돈을 써볼까. 내일 죽는데 좋은 차를 타거나 예쁜 옷을 입는다고 그렇게 즐거울 것 같진 않으니 패스. 이것저것 패스 하다 보니 놀랍게도 주인공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나 역시 내일이 마지막이라해도 평소처럼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오늘과 같은 일상을 보낼 것 같다. 다른 특별한 일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은 햄버거를 먹어야지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로. 업무가 밀리면 안 되니까 인수인계 파일도 만들어 둬야지.


스티브잡스의 유명한 연설중에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이 일을 계속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내느라 자신의 삶을 허비하지 말라는 느낌의 연설이었던 것 같다. 내 대답은 YES인데 그렇다면 나는 잘하고 있는걸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나. 아닌 것 같은데.


3.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 순간을 치열하고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살면 잡스처럼 되는건가. 잡스 아저씨는 행복했으려나. 피곤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건가. 그렇진 않다. 형태가 어떻든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살수도, 저렇게 살수도 있다. 그 형태를 본인의 기준으로 감히 재단하고자 하는 시도를 경계해야한다. 삶은 그 자체로 유일하고 소중하다.


4. 주인공처럼 희망과 행복의 세계 속에 살지는 않지만, 하루를 무난히 보내고 있다. 주인공처럼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면서 내일 죽어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아내기를 바랄 만큼 충만한 삶을 살아내고 있지는 않지만, 하루를 무탈히 보내고 있다. 내일을 살기 싫을 만큼 괴롭지도 않고, 오늘이 마지막이어도 큰 아쉬움은 없을 정도로 무난하고 무탈하다. 적당한 수준의 텐션과 여유, 즐길만한 취미, 소소한 즐거움, 한 번씩 만나는 친구들 등등 이 정도면 살아가기에 흘러넘친다.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좀 빡세지 않으면 어때. 할랑한게 편하잖아.


나쁘지 않다.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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