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두 봉지 삥을 뜯었다
인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쓱 서로 신뢰되는 준거집단이 있다. 각 개인에게는. 나도 그런 준거집단이 하나 있는데, 그 안의 후배가 불쑥 커피를 보내왔다. 커피 좋아한다고 하도 설레발을 뜨니, 합법적인 삥의 분위기를 연출한 모양이다. ㅋㅋ 여튼 합리적으로 삥을 뜯었다. !!!
그 유명하다는 공정무역의 고릴라커피(그것도 르완다)와 향이 좋고 입맛에 풍미가 달달한 말라위커피까지 콩으로 보내왔다. 이런 횡재가 있나.
집을 비운 그제를 지나, 어제 한 밤에 경비실을 경유하여 내 손에 들어왔다. 이쁜 메모와 함께. 커피 750g에 해벌레 해진 속물적 근성을 보고는 혼자 배시시 웃었다. 하루종일 송곳으로 온 몸이 강제 쑤심을 당한 것처럼 아팠는데 저 커피보고는 바로 마음이 스르르 치유되어 버리는.
주소 좀 주세요, 라는 한 밤의 메세지에 바로 보냈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주소를 준다며 깔깔하더라. 뭐 필요하니까 묻겠지, 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데 이 단순함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어느 모임(나에게는 급조된 모임)의 한 총무가 같은 메세지를 보내왔다. 주소 좀 주세요, 라고. 안 보냈다. 내가 거기에서 뭐 받을 것이 없다. 안 보냈더니 문자가 또 와서, 결국 "내가 우편물이나 택배를 거기에서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라고는 마무리했다. 쓸데없는 까칠함이기는 했다마는 여전히 왜 뜽금포로 주소를 묻지, 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이래 일관성이 없다, 내가. 끙!
커피 두 봉지를 받고는 해해거리며 비실비실 웃다가 잠이 들었다. 이 봉지를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 채로 잤더니, 이 새벽에 눈 떠 보니 저 촘촘한 비닐포장을 뚫고 커피향을 쏟고 있다. 오늘은 르완다를 마셔봐야겠다. 아껴 먹고 싶다만, 향 좋을 때 얼른 마시라는 이쁜 부탁이 또 있었으니 얼른 그거 만끽하자로. 해외출장에서 직접 공수해 온 귀한 커피이니 그거 제대로 즐기자는 오만 의미를 다 붙였다.
새삼 새벽에 '관계' 를 또 생각하며 그 많은 함축적 의미를 떠올린다. 그래 마감 한 개의 글은 이것으로 하자. '관계' 라는 소재로 썰을 풀어보자. 이번 달은 추석이 끼어 마감을 정말 잘 지켜달라는 깨알같은 부탁이 있었다. 페북에 쏟은 몇 편의 글처럼 썼다면 그 마감, 몇 개는 마무리했겠다.
물을 올리고 커피를 갈고, 적절히 주전자를 기울여서 나한테 커피 한 잔 제대로 대접하자. 내 사는 것에 다독거림을 잘 챙기며 커피 한 잔 마셔보자. 이 가을을 즐기는 그 여운, 그거 뭐 별거 있나.
고맙다. 합리적인 삥을 즐긴다. 덕분에. 일과 육아와 그리고 마무리할 그 논문에, 모두 건배를 하며 커피 두 봉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부담스럽겠다. 그래야 또 합법적인 삥이 또 오지...ㅋㅋㅋㅋ. 딱 타이밍이 절묘한 시기에 온 커피라 참 많이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네. 축복이다. 쌩큐. 모두들 굿럭.
아침은 이렇게 오고 있다.